[스포츠한국 글=이재호 기자 사진=이규연 기자] 여기 5학년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처음 축구를 하겠다는 얘기를 부모님께 꺼내자 어머니는 그저 우시고아버지는 '만약 시작한다면 포기한다는 얘기를 꺼내지 마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축구를 선택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저 빨리 프로에 진출해 돈을 벌고 싶어 했다. 올림픽대표까지 했지만 누구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줘서'가 아니라 '돈을 주는 곳'이 일본뿐이라 당시 무분별하게 많았던 J리그행에 동참하게 된다.

다행히 이후 승승장구하다 월드컵을 바로 앞에 두고 부상을 당하며 월드컵행이 좌절되기도 했다. 전화위복으로 큰 시련을 견디고 세계 최고의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다. 그리고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올랐을 때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활약으로 전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돈' 때문에 철이 일찍 든 이 아이는 어느새 분데스리가 두 번째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김진수(23·TSG 호펜하임)의 얘기다.

장학생이 되고 싶어 했던 학창시절, 그저 '돈'이 필요했다

김진수는 경기도 용인 포곡초등학교 5학년 때 전복식 감독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 농구선수였던 어머니는 반대가 심했고 아버지 역시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아들을 운동의 길로 가게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축구부 합숙에 들어갔어요. 첫 일주일은 매일 울었어요.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죠. 그때 많이 울면서 꼭 축구선수로 성공할거라고 다짐했어요. 사실 당시 저희 집 사정이 어려웠거든요. 워낙 집이 작고 초라해서 오죽하면 친구가 놀러 와도 집을 보여주기 싫어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나가서 놀았을 정도니까요."

"당시가 2002 한일월드컵으로 뜨거웠을 시기인데 아직도 기억하는 게 4강을 가니까 선수들에게 포상금과 차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걸 보고 축구선수가 되면 전부 월드컵에 나가고 돈을 많이 버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도 축구선수로 돈을 많이 벌어서 집안 사정을 나아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결국 그렇게 축구를 시작했네요."

그가 진학한곳은 용인 원삼중학교의 축구센터. 그곳은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지만 한 달에 100만원 이상의 돈을 내야만 계속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웠지만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가 돈을 마련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납입해주셨어요. 그 덕분에 축구를 했죠. 전 없는 돈 긁어모아 납입한다는 것을 알기에 돈을 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장학생이 되어야했어요. 장학생이 되기 위해 혼자 새벽운동을 하고 단체훈련이 끝나고 또 저녁운동을 했어요. 일주일에 한번 외박을 나갈 때 다들 집에 가지만 전 혼자 남아 훈련을 했어요. 그저 장학생이 돼서 돈을 안내고 싶었던 거죠."

돈 더 벌려고 J리그? 불러주는 곳이 없어 가야했던 J리그

경희대에서 새내기를 마칠 때쯤 김진수는 간절히 프로행을 원했다. 당시 집안 사정은 더 안 좋아졌고 이에 어서 프로선수가 돼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어느 팀도 김진수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다. 비록 연령별대표팀을 거쳐 청소년 대표까지 거쳤지만 그 어떤 K리그 팀도 김진수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관심은 보냈지만 적극적으로 드래프트에 지원서를 넣으라고 하는 K리그팀이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에이전트를 찾아가 부탁했죠. '팀 좀 알아봐달라'고. 그렇게 찾은 팀이 알비렉스 니가타였죠. 근데 알비렉스도 절 위해 부른 금액이 전혀 제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거예요. 전 나름 올림픽 대표도 했으니 그것보다는 많이 받을 줄 알았거든요."

"그때서야 깨달았죠. K리그도 부르지 않고 J리그에서도 겨우 이정도 금액으로 나를 부르는 걸보면 난 대단하지 않다는 걸요. 지금까지 전 자부심이 아닌 자만심만 있었던 거죠. 그때 많이 울면서 축구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어릴 때 아버지와 한 다짐을 떠올리고 어머니가 터뜨리신 울음을 기억하니 '그래도 일본 가서 해보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죠."

긴장됐던 국가대표 첫 소집과 일본 팬에게 미안했던 독일진출

김진수는 다행히 첫해부터 일본에서 주전을 꿰찼다. 그리고 2년차 시즌이었던 2013시즌, 본인도 느낄 정도로 급성장했다. 그리고 2013 동아시안컵 호주전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처음 데뷔하게 된다.

"힘든 일본에서의 첫 시즌을 보내고 나니 두 번째 시즌부터는 '하고 싶은거 다하자'는 생각으로 축구를 하니 오히려 잘됐어요. 그래도 홍명보 감독님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많이 놀랐죠. 첫 소집될 때가 기억나네요. 어릴 때부터 연령별대표팀 때문에 파주 NFC를 많이 오갔는데 그때 소집돼서 정문에서 훈련장까지 걸어가는데 멀리 취재진이 절 찍고 있고 긴장되고 하던 순간은 정말 영원처럼 길었어요. 가장 긴장한 순간인 것 같아요."

비록 월드컵은 가지 못했지만 국가대표와 일본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김진수는 지난해 독일 분데스리가의 중위권 클럽인 호펜하임으로까지 이적하게 된다. 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돈'이 팀 선택의 기준이었죠. 하지만 전 지난해 초 이미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재계약을 했기 때문에 돈이 더 이상 팀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어요. 지난해 6월쯤, 호펜하임 말고도 제의를 받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는게 제 기준이었어요. 출전기회가 보장돼야 했어요. 결국 호펜하임은 아시안게임까지 나갈 수 있게 보장해주면서 출전기회도 줄 수 있는 팀이기에 선택했죠."

김진수가 알비렉스 니가타를 떠날 때 미안함에 기상천외한 이벤트를 한 것이 아직까지도 현지에서 회자되고 있다.

"알비렉스 측이 입단 2년이 지나자 제 생각보다 많이 인정해주시는 재계약을 해주셨어요. 그런데도 전 6개월 있다 독일로 가게 됐죠. 미안함이 컸어요. 그래서 떠나기 전에 구단을 찾아 직원 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 드렸죠. 그러고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아 구단 SNS를 통해 지금 홈구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오시면 작별인사를 드리겠다고 팬들에게 남겼어요."

"놀랍게도 무려 900명 가까이 저를 환송하러 오셨어요. 그렇게 많이 오셨는데 고작 마이크잡고 인사만 드리는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여기 오신 분들 모두 사진 찍어드리고 사인을 해드리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5시간정도 걸려서 전부 다 해드렸어요.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커요. 알비렉스 니가타는 참 고마운 구단이예요. 아무도 받아주지 않던 저를 기회의 문으로 이끌어준 곳이잖아요."


김진수의 알비렉스 니가타 송별회 모습. 김진수와 사진을 찍기위해 기나긴 행렬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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