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KBO 신인드래프트 트라이아웃에 지원한 비선출 트리오 박지훈-지승재-장진호. 연합뉴스 제공
[스포츠한국 파주=윤승재 기자] 지난 5일 ‘2020년 KBO 신인드래프트 트라이아웃’이 열렸던 수원KT위즈파크에서는 각기 다른 사연의 ‘야구판 미생’들이 모여 자신의 기량을 뽐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가 국내 무대 입성을 꿈꾸는 해외 유턴파와 해외 아마추어 선수, 그리고 프로 스카우트 앞에서 실력을 검증받고자 하는 ‘비 엘리트 선수 출신(비선출)’까지 총 8명의 선수들이 10개 구단 스카우트의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지난해 바로 이곳에서 한선태의 ‘비선출 신화’가 시작됐다.

엘리트 야구를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한선태는 지난해 이곳 수원에서 시속 145km의 공을 뿌려 프로 구단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2019 신인 드래프트에서 LG의 지명을 받으며 KBO리그 37년 역사상 최초의 비선출 선수가 됐다. 2군에서 두각을 드러낸 한선태는 지난 6월 꿈에 그리던 1군 무대를 밟으며 비선출 신화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19년. 한선태가 꿈을 이룬 똑같은 장소에서 3명의 비선출 선수가 ‘제2의 한선태’를 꿈꾸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의 내야수 박지훈(26)과 외야수 지승재(25), 투수 장진호(25)이 그 주인공이다.

2020 KBO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8명의 선수들. 해외 유턴파들 속에서 파주 챌린저스 비선출 트리오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포츠코리아 제공
▶ ‘야구가 좋아서’ 시작한 야구 선수의 꿈, ‘야구가 좋아서’ 포기 못해

한선태와 똑같은 꿈을 품고 그라운드에 나선 세 선수 모두 시작부터 도전까지 모두 한선태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야구에 다소 늦게 흥미를 가진 탓에 시작이 늦었고, 초중고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는 엘리트 야구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부모님의 반대 혹은 금전적인 문제 등 개인 사정까지 겹치면서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 선수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 박지훈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동아리 야구로 실력을 다진 뒤, 오산시 리틀야구단에서 코치 생활을 하면서 야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캐치볼로 야구를 시작한 장진호는 틈틈이 사회인야구를 하면서 그 꿈을 이어갔다. 부모님의 반대로 미국 유학까지 갔던 지승재는 학교 클럽 야구팀에 들어가 야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야구장에 처음 간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수원 현대 유니콘스 경기를 보러 갔는데 그 때 이숭용과 송지만 선수가 동점과 역전을 이끌어냈던 걸로 기억해요. 그날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바로 캐치볼을 시작했죠. 그렇게 야수 선수의 꿈을 꾸게 됐어요."(박지훈)

"저도 처음 야구장 간 순간을 잊지 못해요. 어머니랑 같이 대전 야구장에 처음 갔는데, 관중석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지났을 때 그 느낌 있잖아요? 확 트인 그라운드와 함께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 오는. 그걸 보고 '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장진호)

"저는 유학 시절 형이 보던 야구 만화책으로 처음 야구를 접했어요. 그러다가 옆집에 한국인 가족이 이사와서 같이 캐치볼을 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에요. 그 뒤로 부모님을 졸랐죠. 나중에 야구 명문 고등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공부 때문에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야구를 놓지 못하겠더라고요.'(지승재)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파주 박지훈. 스포츠코리아 제공
이들은 2018년 파주 챌린저스 트라이아웃에 합격해 한솥밥을 먹게 됐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은 계속됐다. 독립야구단 특성상 선수들은 매달 100만원 전후의 적지 않은 회비를 내야 했다.

장진호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올 시즌 회비를 감당하고 있고, 지승재는 1년 동안 중소기업에서 모은 돈으로 회비를 충당했다. 박지훈 역시 리틀야구단 코치와 주말리그 심판을 통해 받은 돈으로 회비를 내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박지훈은 “단순히 야구가 좋고,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버티고 있다”라고 전했다.

지승재와 장진호는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 한계까지 맛보고 끝내고 싶은데 아직은 계속 성장 중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불태워보고 시원하게 끝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파주 지승재. 스포츠코리아 제공
▶ 처음 맛보는 스포트라이트에 ‘호흡곤란’까지, 긴장과 후련 공존했던 트라이아웃 도전기

강한 의지를 품고 트라이아웃에 도전했지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이전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에 세 선수 모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찰나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움찔하기도 하고, 배팅 케이지를 둘러싼 무수한 시선에 호흡곤란이 오기도 했다. 긴장감과 함께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겹치면서 그들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후회 없이, 후련하게 잘 했다”라고 회상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자신들의 노력을 프로 스카우트 앞에서 어필할 수 있었고, 선수들 개인적으로도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만족해 했다.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파주 장진호. 스포츠코리아 제공
아쉽게도 프로 스카우트의 시선은 냉정했다. 쇼케이스가 끝나고 진행된 10개 구단 스카우트들과의 면접에서 세 선수는 한 개의 질문도 받지 못했다. 모두 해외 유턴파 출신 선수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세 선수 역시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박지훈은 “지난해 한선태의 트라이아웃 영상을 봤는데 스카우트 한 분이 ‘대단하네, 인간승리다!’라고 하시더라. 나도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트라이아웃은 또 다른 계기가 됐다. 야구 내적으로는 오히려 자신감을 심어줬고, 야구 외적으로는 마음가짐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화끈한 타격으로 펜스를 맞춘 지승재는 “조금 더 체중을 불리고 힘을 키우면서 기본기를 더 다지면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라고 전했다. 카메라 압박을 이겨낸 장진호는 “평소 시합 땐 프로 스카우트 한 명만 와도 긴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던지고 나니 ‘그동안의 압박이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방주사를 맞은 느낌이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맏형 박지훈 역시 “마음이 가벼워졌고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한 단계 더 성장한 느낌이다”라며 활짝 웃었다.

박지훈의 배트에는 '야구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박지훈 본인 제공
▶ 트라이아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야구의 끈, 놓지 않을 겁니다”

트라이아웃은 끝이 났다. 오는 26일 열릴 2020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들의 프로행 여부가 결정된다. 설령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이들의 야구 인생은 끝이 아니다. 프로에 대한 꿈을 이어가거나, 프로가 되지 못하더라도 야구의 끈은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그들이다.

“트라이아웃을 통해 어느 정도 포커스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신인 드래프트까지 독립야구 경기가 조금 남아 있는데, 관심이 한 번이라도 더 올 거라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뛰겠습니다.”(박지훈)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확 늘어나고 있어요. 지금부터 드래프트까지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그때까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장진호)

“드래프트가 아니더라도 이후 프로테스트도 있고 기회는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여러 사정상 (선수 도전이)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은데, 그래도 야구 쪽에서 일을 하는 게 제 소원이에요. 야구의 끈은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지승재)

파주 박지훈-지승재-장진호. 선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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