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면'서 프로파일러 박은주 역 열연

생기발랄하고 톡톡 튀던 이미지가 오간데 없다. 그윽한 시선으로 담담히 인생관을 얘기하며 대화의 상대방을 여유롭게 배려하는 29살의 여배우 김민선.

영화 '가면'(감독 양윤호, 제작 디알엠엔터테인컨트)의 여주인공 김민선과의 대면은 편안하고 풍성했다. 1999년 영화 '여고괴담2'로 데뷔해 드라마 '학교', '유리구두', '현정아 사랑해', '한강수타령', 영화 '하류인생' 등 쉼 없이 내달려온 그가 2~3년의 휴식을 거쳤기 때문일까.

'가면'에서 프로파일러형 여형사 박은주 역을 맡아 김강우(조경윤)을 향한 짝사랑을 한 켠에 묻어둔 채 과학 수사에 매진한 그는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새롭게 연기 활동에 기지개를 켤 에너지를 얻었다.

이미지로만 먹고 사는 반짝 스타가 아닌 일상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딘 직업 연기자를 꿈꾸는 김민선은 "지금 백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지 마라톤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달리고 있다. 숨차면 숨 고르며 걸어가면 된다. 급하게 생각 안하고 움직이려 한다. 전에는 '여배우는 예뻐야 돼, 못해도 자신감 있다고 해야 돼, 입도 크게 벌리며 웃으면 안돼, 얌전해야 돼' 등 무수한 고정 관념들 속에 살았다. 나도 근사한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 거기에 끼워 맞추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냥 인간 김민선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 드라마 '영재의 전성시대' 이후 작품 활동이 뜸했다. 2년 만에 '가면'으로 인사하기까지 뭘 했나.

▲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이전에는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기를 했던 것 같다. 정신없이 미친 듯이 달려왔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내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발인 바로 다음 날부터 영화 '하류인생'을 찍었다. 먼저 가신 엄마께 당신이 가시더라도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정말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그 때부터 작년 12월까지 꼭 4년 동안 목표를 잃은 채 살았던 것 같다.

뭘 해야 재미있는 지 어디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가면'이라는 영화로 워밍업을 하게 됐다. 이제야 내가 촬영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구나, 내가 가장 즐거운 곳은 촬영장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동안 '천상의 피조물'이나 '별빛 속으로'에도 참여했지만 촬영장을 떠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때문에 머물렀던 것 같다.

- '가면'에서 프로파일러 형사 역을 맡았다. 작품에 참여한 뒤 느낀 성과와 아쉬운 점은?

▲ 형사 역할은 처음 맡아봤다. 평소 연기할 때 표정이나 동작이 큰 편인데 은주 역할에서는 냉철함을 강조하기 위해 눈 동작과 손동작을 크게 줄였다. 꼭 필요한 동작이 아니면 쓰지 않았다. 그런 시도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또 예전과 달리 장면 별 모니터를 하지 않았다. 모니터는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현장 편집도 보지 않았고. 보통 현장 편집을 확인하고 감정을 계산하고 따라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그냥 그 때 그 때 느껴지는 감정선을 최대한 따라갔다. 꼭 이 방법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의 경력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연기가 정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시도였다.

반면 공간을 못 보고 움직였기에 공간 활용성은 좀 떨어졌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경윤을 떠나보낸 후 라이터를 놓고 돌아서는 장면을 촬영할 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생각하는 은주는 매우 이성적이고 냉정을 잃지 않는 친구이고 그 장면에서는 그동안 묵혀온 감정을 죽 가지고 가다가 눈물 한 방울 떨구는 정도였어야 하는데 너무 은주에게 몰입하고 말았다.

갑자기 은주가 너무 가련하게 느껴져 촬영이 끝나고 카메라를 옮기는 순간까지도 펑펑 울고 말았다. 좀 더 쿨하게 놓아줘야 했는데 아쉬움이 있다.

- 경찰서 내부가 매우 세련돼 놀랐다. 형사들도 과학 수사를 중시하던데…

▲ '가면'의 경찰서 장면이 아마 국내 영화 중 가장 세련됐을 것이다. 부산에 있는 디자인 센터에서 경찰서 장면을 촬영했다. 아직 입주도 안 된 새 건물이었는데 계단이 있는 복층 공간을 세트로 만들었다. 형사 개개인도 그렇고 공간도 거칠거나 지저분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련되고 현대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 극중 김강우를 짝사랑 하면서도 표현 한 번 못한다. 시사회 이후 김강우와 이수경의 베드신이 유독 부각된데 대해 서운함은 없나?

▲ 두 사람의 베드신에 초점이 맞춰진 건 너무 당연한 결과다. 은주에게 주어진 일은 프로파일러 형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내는 것과 조 형사와의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일이었다. 배우의 할 일은 카메라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면 족하다. 화제에 오르느냐 아니냐는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다.

흥행도 마찬가지다. 홍보 활동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 스코어는 주위에서 만들어주는 거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으면 맘만 상하게 된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실은 꽤 일찍 깨달았다.

이번 영화는 '내가 주인공이야'라는 마음보다는 '이제 연기를 제대로 열심히 해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워밍업에 나선 작품이다. 촬영장에서 워밍업을 충분히 마쳤고 그것이면 됐다.

- 김민선이라는 배우는 스타의 이미지 보다는 친근한 이웃집 여동생의 느낌이 더 강하다. '한강수 타령'이나 '영재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 속 캐릭터 때문인가.

▲ 직업이 배우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발을 빼는 스타일의 인간형은 아니다. 연예인 자질도 좀 부족한 편이고.

20대 초반에 이 쪽 일을 시작했다. 인기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좋아서 연기를 시작한 게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다른 인물의 삶을 살고 또 다른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 허구의 세상에서 내가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천국행 티켓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연기의 매력이다.

하지만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혼재도 오는 것 같다. 그래서 실제의 삶과 허구의 삶을 구별 못하는 몇몇 배우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일상에 당당히 붙어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맡는 인물의 98%가 보통 사람인데 간접 경험만으로 그들을 표현한다면 당장 부족함이 있을 거다.

연예인으로서의 화려한 모습은 스페셜 데이(시상식 등) 때면 충분하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 한도에서 최대한 풀어놓고 살아가고 있다. 혼자 나가서 길을 걷기도 하고 쇼핑을 하기도 하고 남의 눈치를 잘 안보는 편이다. 강남 주민의 90% 이상은 내가 동네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셨을 거다.

- 평소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 안 믿으시겠지만 주로 먹는 걸로 푼다. 피곤할 때 우선 과일을 먹고 그걸로 안 되면 고기만두를 먹는다. 그걸로 안 되면 극단의 조치는 쵸콜릿이다.

- 안티가 없기로 유명하다.

▲ 무슨 말씀? '유리 구두'에서 선우(김현주)를 너무 괴롭혀서 초등학생에게 돌맹이도 맞아 봤다. 그 때가 2002 월드컵 때였는데 아마 최고의 악플은 그 때 다 받아본 것 같다. 그 때부터 인터넷을 안하게 됐다. 그러다가 미니홈피도 작년부터 시작했다.

- 김민선에 대한 세상의 오해가 있다면.

▲ 방송에서 춤을 한두 번 췄는데 춤을 잘 추니 항상 나이트에서 살 것이라거나 술도 잘 할 거라는 오해가 있다. 활명수 한 병에도 취하는 체질이라는 건 잘 모르신다.

춤 얘기가 나왔으니 얘긴데 죽기 전에 춤에 관한 영화는 꼭 참여하고 싶다. 춤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떡 벌어지게 만들 자신이 있다. 운명적으로 느끼는 게 춤에 대해서는 뭔가 꼭 풀고 가야 한다고 느낀다. 가볍고 쉽게 풀어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열정을 박진영씨 뮤직 비디오에서 조금은 선보인 것도 같다.

- 신작 '그들이 온다'에서 이범수와 호흡을 맞춘다. 두 사람의 호흡이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 나도 매우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범수씨의 약혼자 역할이기는 한데 둘이 만나는 장면은 초반과 끝 밖에 없다. 손창민, 이한위, 김뢰하 선배 등 쟁쟁한 분들이 함께 참여하는 작품이라 오빠들에게 묻어갈 계획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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