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시절의 송유석. KIA 제공
[스포츠한국 김성태 기자]지금은 '신고선수'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그런 용어도 없었다. 그냥 '연습생'이었다. 학창 시절에 주전자에 물 담아서 오는 그런 선수 있지 않나. 프로에 와서 재능을 인정받은 상위 지명 선수와 달리 이들 '연습생'은 제대로 된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최고의 팀으로 불렸던 해태는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많았다. 연습생 출신이 이들과 실력을 겨뤄서 이겨내고 1군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 팀 주전급 선수들도 해태로 오면 자리를 못 잡는 수준이니 당연했다.

그 호랑이 틈바구니 속에서 '원조' 연습생 신화라 불리며 나름 해태에서 족적을 남긴 투수가 있다. 수없이 많은 배팅볼을 던지면서 자연스레 단련된 어깨 덕분에 프로에서 살아남았다. 단단한 체구와 밑바닥부터 기어서 올라오며 버텨낸 근성, 여기에 부리부리한 눈에서 느껴지는 승부근성까지, 언제 어디서든 부르기만 하면 마운드로 올라갔다. 바로 '마당쇠' 송유석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 삼성과의 3차전에 마운드에 올라온 송유석. MBC 캡처.
투창 선수 출신의 야구 선수, 시작은 그저 배팅볼 던지던 연습생

1966년 전남 고흥 출신이다. 고흥대서중을 거쳐 광주 진흥고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야구를 하지 않았다. 대신 투창 선수를 했다. 전남 대표로 나가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낼 정도였으니 어깨 하나는 타고난 선수였다.

진흥고에 와서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 심지어 공을 제대로 잡고 던진 것은 3학년 때다. 4개월 정도 선수로 뛰다가 1984년 대통령배 지역대회에서 최우수 선수로 뽑히며 갑작스레 주목을 받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다. 이후 연세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김응용 감독의 해태가 슬며시 접촉했다.

프로에 가면 많은 돈을 받고 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태는 1984년 1차 지명을 받은 문희수가 고등학교 졸업 후, 입단 첫해에 저조한 성적(5경기 12.2이닝 평균자책점 4.26)을 기록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실력을 갈고 닦았으면 좋겠다며 신고선수로 입단할 것을 권유했다.

아쉬운 마음에 대학 진학으로 급선회 했지만 기차는 떠났다. 입시 기간은 끝났고 그렇게 울면서 해태에 입단했다. 그게 연습생 송유석의 시작이었다. 1985시즌부터 해태 유니폼을 입었지만 1군 등판 기회는 없었다. 타자들의 연습 상대로 배팅볼을 던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볼만 던지는 것도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일은 다 했다. 타자들이 쳐낸 공을 모두 주어서 담아야 했고, 타격 연습이 끝나면 그물망도 치워야 했다. 주전 선수들이 연습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면 송유석은 남아서 그라운드 뒷정리를 했다. 송유석은 입단 후, 2년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해태 시절의 송유석. KIA 제공
부르면 언제든 공을 던지던 '마당쇠' 송유석, 해태 불펜이 강했던 이유

첫 1군 등판은 1987년이었다. 프로 3년차였다. 비중은 크지 않았다. 1987년 4경기, 1988년 3경기, 1989년 3경기가 전부였다. 패전용 투수였다. 그러다가 1990시즌부터 본격적으로 기회를 부여받았다. 34경기에 나와 98이닝을 소화하면서 2승 1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중간 투수로 팀의 허리를 담당했다.

투창 선수 출신이다 보니 공을 던지는 폼과 타이밍이 남다르다. 몸을 최대한 앞으로 끌고 오면서 어깨로 공을 확 채는 느낌으로 뿌린다. 특히 우타자 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싱커성 볼을 주무기로 삼았다. 상대 타자들이 장타를 쳐내지 못했다. 1990시즌에 그는 90개의 안타를 내줬지만 피홈런은 딱 3개뿐이었다. 무엇보다 몸에 맞는 사구로도 유명했다. 통산 104개나 된다. 타자들이 무서워서 피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만큼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1991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 필승조로 합류했다. 그 해 37경기에 나와 145.2이닝을 던져 11승 4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2.97을 기록했다. 1992시즌에는 4승 10패 4세이브로 주춤했지만 1993시즌(11승 6패 1세이브), 1994시즌(10승 8패 7세이브), 1995시즌(10승 3패 3세이브) 모두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매년 두 자릿수 승수를 따냈다. 선발도 아닌데 승수를 이렇게 올렸으니 말 그대로 부르면 올라가서 던지고 또 던졌다.

별명인 마당쇠처럼 1991시즌부터 그는 5년 연속 110이닝 이상을 뿌리며 튼튼한 어깨를 자랑했다. 입단 초기부터 수없이 많은 배팅볼을 던져야 했으니 아프지 않아야 했다. 자연스레 부상 없이 공을 던질 수 있는 자신만의 투구 폼을 찾을 수 있었고, 힘 빼고 던지는 노하우가 곁들여지면서 제구까지 잡혔다. 송유석 본인도 은퇴 직전까지 어깨나 팔이 아픈 적이 없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1996시즌 하와이 항명 사건을 비롯, 구단과 갈등이 생기면서 우승 직후에 최향남, 동봉철과 함께 트레이드 되어 LG로 떠났다. 송유석은 LG 불펜에서도 제 역할을 확실히 해냈다. 1997시즌 78.1이닝, 1998년 91이닝, 1999년 82이닝을 던졌다. 심지어 1999시즌에는 LG 주장도 했다. 해태 출신이 LG에서 주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름 리더십이 있는 선수였다. 이후 2000년에 한화로 트레이드 됐고 2년을 뛰고 조용히 은퇴했다.

LG 시절의 송유석. 스포츠코리아 제공
연습생에서 시작해 타이거즈 우승을 이끈 주역 되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했던 악바리 같은 선수였다. 무엇보다 타이거즈 팬들이 송유석 하면 떠올리는 경기는 단연 1993년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이다. 당시 1승 1패로 팽팽했던 해태와 삼성이 만났다. 삼성은 박충식, 해태는 문희수가 선발로 나왔다. 시작부터 균형이 무너졌다.

문희수가 4회도 채 버티지 못하자 김응용 감독은 곧바로 선동열을 투입했다. 박충식의 혼신의 투구를 앞세운 삼성은 연장 10회까지 승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선동열이 끝내 마운드에서 내려가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 선동열이 나갔으니 이제 해태를 잡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김응용 감독은 11회부터 송유석을 투입시켰다. 양 쪽 어깨를 휙휙 돌리며 몸을 풀던 송유석은 그렇게 15회까지 5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고 삼성 박충식의 15이닝 181구 완투 피칭을 무승부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3차전을 내주지 않은 해태는 4차전에 패했지만 남은 5, 6, 7차전을 모두 승리로 가져가며 우승을 차지했다.

결과적으로 3차전에서 181구를 뿌렸던 박충식이 7차전에 나와서 무너졌던 것도 3차전 송유석이 연장 들어서도 무실점 피칭으로 경기를 내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명은 커녕 연습생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열정과 오기 하나로 버텼고 해태 왕조 우승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가장 중요했던 순간, 송유석은 팀의 우승을 이끈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태 선수단. KI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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