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김성태 기자]홈런왕 하면 누가 떠오를까. '라이언킹' 이승엽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한 시즌에만 56홈런, KBO리그에서 통산 467개를 쳐냈다. 일본에서 때려낸 159개를 더하면 무려 626개의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으니 말 그대로 클래스가 달랐다.

하지만 홈런왕 앞에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선수는 따로 있다.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무지막지 하게 방망이를 돌리는 호쾌한 스윙의 소유자, 콧수염을 달고 있는 KBO리그 원년 홈런왕, 올드 팬이라면 익숙한 그 이름, 바로 타이거즈 레전드 김봉연이다.

타이거즈 코치 시절의 김봉연. 스포츠코리아 제공
연대 김봉연이 노히트 노런으로 고대를 잡다

1952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때 3연타석 홈런을 쳐냈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힘 하나는 알아주는 장사였나보다. 역전의 명수라 불리는 군산상고에서 야구를 했다. 당시 투수도 하고 붙박이 4번 타자도 하면서 1971년 52회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연세대에 진학했다.

1973년이 재밌다. 5월 춘계리그에서 라이벌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호랑이 코를 제대로 뭉갰다. 그리고 9월 추계리그 연맹전에서 동아대를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쳐내며 4타수 4안타 3홈런 6타점으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 대학야구 최초 3연타석 홈런의 타자이자 노히트 노런의 투수, 그게 김봉연이었다.

당시에 한국은 실업 야구가 있었다. 육군 야구단을 거친 후, 한국화장품에 입단한 김봉연은 1978년부터 1981년 실업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챙겼다. 태극마크는 당연했다. 국가대표 4번으로 뛰며 1975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1982년 고대하고 고대하던 KBO리그가 생겼다.

2003년 KIA OB팀으로 나섰던 김봉연.스포츠코리아 제공
원년 홈런왕, 타이거즈 KS 첫 MVP, 타이거즈 첫 100홈런 타자

1952년생 김봉연이 타이거즈에 입단했을 때, 이미 30살이었다. 당시 실업야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2400만원이라는 원년 선수 연봉 1위 타이틀을 갖고 있었지만 전성기가 지나고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시점에 프로에 입단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김봉연은 더 날아올랐다.

1982년 그는 74경기에 나서 269타수 89안타 타율3할3푼1리 22홈런 52타점을 기록, 원년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22개의 홈런을 쳐낸 사이에 허용한 삼진이 딱 16개다. 정확성과 파워, 모두를 겸비한 완벽한 타자였다. 4할 타자 백인천과 '헐크' 삼성 이만수조차 홈런에서는 그를 넘지 못했다.

2년 째인 1983년에도 그는 80경기에 나서 22개의 홈런을 쳐냈지만 이만수의 27개에 밀리며 2년 연속 홈런왕 도전에 실패했다. 당시 그는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기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처를 가리고자 길렀던 것이 바로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이었다.

홈런왕을 내주긴 했지만 다른 것으로 만회했다. 1983년은 타이거즈가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던 해다. 그리고 그 해 한국시리즈 MVP가 바로 김봉연이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모두 17개의 홈런을 쳐냈다. 그리고 1986년 108경기에 나와 407타수 122안타 타율3할 21홈런을 기록하며 생애 두 번째 홈런왕에 올랐다. 하지만 1986년 프로 첫 100홈런 경쟁에서 이만수에 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 1987년에 6개, 1985년에 5개를 추가하며 모두 110개를 채웠다. 이만수에 초대 100홈런 타자 자리는 내줬지만 타이거즈 타자로는 김봉연이 첫 100홈런의 주인공이었다.

콧수염 홈런왕이라 불렸던 김봉연. MBC 캡쳐.
타이거즈 초대 4번 타자, 영구결번도 가능했던 김봉연

프로에서 뛰는 선수 중 천재 소리 안 들어본 이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김봉연은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대학 시절에 3연타석 홈런을 '몇 차례' 쳐낼 정도의 타자였다. 투수도 하고 타자도 했지만 1977년 대학선수권 대회에서는 도루왕까지 했으니 발도 빨랐다. 천재의 특징인 '이도류'는 말 그대로 기본인 셈이었다.

1983년 당시 MBC 청룡을 한국시리즈에서 4승 1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제압, 첫 우승을 따냈을 때도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무려 19타수 9안타 타율4할7푼3리 1홈런 8타점을 찍었으니 청룡 팬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창단 4번 타자이자 리그 원년 홈런왕, 타이거즈 첫 100홈런 타자이자 첫 한국시리즈 MVP, 그리고 우승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 게다가 원년이라는 플러스 요인을 갖고 있으니 명분마저 확실하다. 이 정도면 영구결번도 무방하다.

LG도 두산도 팀의 첫 우승을 함께 했던 선수는 모두 영구결번을 달았다. OB의 21번이자 원년 우승을 이끈 22승 박철순도 그렇고 MBC-LG를 거쳐 1990년, 1994년 팀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달았던 '노송' 김용수의 41번도 영구결번이다.

김봉연의 선수생활 마지막 해였던 1988년 당시 우승을 차지한 타이거즈. 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달지 못했다. 두 선수와 달리 김봉연은 야수였다. 9명 중 1명이라는 점에서 투수에 비하면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프로에 왔을 때, 이미 30살이었기에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뛴 것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년이 전부였다. 박철순이 15년을 뛰었고 김용수가 16년을 뛴 것과 비교하면 적다.

타이거즈가 수없이 많은 '레전드급' 스타를 배출하고도 영구결번이 18번 선동열과 7번 이종범 뿐이라는 것을 본다면 김봉연이 그 마지노선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구결번이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최고의 명예라는 것, 타이거즈에서는 김봉연을 넘어서야 영구결번을 달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