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

상식 문제 하나, 다음은 어느 나라 국민일까?

“10명 중 7명 이상이 인터넷을 쓴다(2006년 세계 6위)”, “10명 중 3명은 초고속 인터넷에 가입했다”(2007년 세계 4위), “두 명당 1대꼴로 개인용 컴퓨터(PC)가 보급됐다”(2005년 세계 8위)

"삐릭 삐릭" 연결음만 들어도 가슴 뛰어


정답은 한국이다. 국내 총생산(GDP)으로 따져 세계 13위인 국가가 정보, 기술(IT) 분야에선 대부분 항목에서 세계 10위 안에 든다. 속도 경쟁에선 단연 세계 1위다. 특히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수 1,000만명을 돌파한 건 한국이 세계 최초였다.

국산 컴퓨터 1호 개발 1983년, 일반인의 인터넷 첫 접속 개시 1995년,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은 이보다 4년이 늦은 1999년이었음을 감안하면 가히 ‘광속(光速)’이라 할 만하다.

국토는 작은데다 인구가 수도권과 대도시의 아파트에 밀집한 게 인터넷 보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여기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와 남이 하면 일단 따라가고 보는 ‘쏠림’ 정서도 세계에서 최단 시간에 한국을 IT 강국으로 거듭나게 만든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음성이 아닌 문자 통신이 처음 시작된 건 197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 예산을 전산화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AIST의 전신) 대형 컴퓨터와 경제기획원 예산실 컴퓨터를 연결한 게 처음이다. 1972년 11월에는 외환은행이 본점과 지점 사이에 전용회선을 깔아 민간 데이터 통신의 효시가 됐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데이터 통신은 은행이나 항공사, 철도청의 전유물이었다.

1982년 한국 데이터통신(현 LG데이콤)이 설립되자 IT 시계바늘은 갑자기 빨리 돌기 시작했다. 1985년 데이콤의 PC 통신 서비스 ‘천리안’의 등장은 젊은 세대의 문화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PC통신은 젊은이들이 정보와 세상 사는 이야기를 소통하는 미지의 신세계였다. 동양상은커녕 사진도 올릴 수 없는 투박한 화면이었지만 ‘띠릭, 띠릭, 띠리리릭’하는 느릿느릿한 통신 연결음만 들어도 마음이 설???

2000년 가입자 1000만 돌파


PC통신마다 수천개 동호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오늘날 인터넷에 퍼진 동호회는 이 때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울 장안동의 은석 초등학교는 전교생 1,200여명과 교사 전원이 PC통신에 가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천리안에 이어 하이텔(1992년), 나우누리(1994년), 유니텔(1996년), 넷츠고(1997년)가 잇따라 PC통신 서비스를 시작하자 속도 경쟁이 붙었다.

전화선을 그대로 쓰다 1994년부터는 케이블 모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빨라지자 가입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987년 226명이었던 가입자는 10년만인 1997년 310만5,321명으로 1만3,740배가 됐다. 1998년 500만명, 2000년 1,000만명을 넘어섰다.

PC통신 시대의 가입자는 유료 회원이었다. 익명은 쓸 수 없었다. 1,000만명 가입자 시대였어도 ‘악플(악성 댓글)’이나 ‘욕설’이 비교적 적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유료 서비스와 느린 속도가 PC통신 시대의 종말을 고한 단초가 됐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PC통신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 1994년 한국통신, 데이콤, 아이네트가 일반인을 상대로 인터넷 연결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PC통신에 비해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양과 질 모두에서 미흡했기 때문이다.

2007년 인터넷에 밀려 종말


인터넷 공세는 1998년 두루넷이 한국전력의 광케이블을 활용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들고 나오면서 본격화됐다. 이듬해 하나로통신은 전화선을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기술인 ADSL을 선보였다. 원래 제2 시내전화 사업자였던 하나로통신은 유선전화 가입자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초고속 인터넷에 사활을 걸었다. 이에 자극받은 한국통신도 같은 해 ‘메가패스’라는 이름의 ADSL 서비스를 시작했다.

PC통신 가입자가 서비스회사 간 경쟁에 의해 비약적으로 늘었듯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도 경쟁이 격화하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지 불과 5년만에 1,000만명 가입자 시대가 열렸다.

이미 인터넷에 밀리기 시작한 PC통신에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린 건 무료 이메일 서비스였다. 1997년 5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국내 처음 제공했다. 여기에다 검색 및 포털 사이트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거의 무한정의 정보와 커뮤니티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정보의 질도 갈수록 높아졌다. 유료 서비스를 고집한 PC통신이 가입자로부터 외면 당하는 건 당연했다.

PC통신 회사도 하나 둘 모뎀을 이용한 접속 서비스를 중단하고 웹 기반의 인터넷으로 옮겨갔다. 적자를 감수하고 끝까지 PC통신의 명맥을 이었던 하이텔이 2007년 3월부터 가상터미널(VT) 기반의 접속 서비스를 중단함으로써 PC통신은 역사의 무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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