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초등학교 16개 세울것"… 도전은 계속된다
22년간 고산 도전 38번중 18번 실패
수많은 죽음의 위기 닥칠때마다
"살려주시면 좋은일 하겠다" 기도
지구 환경 지키는 일에도 큰 관심

히말라야의 산신들이 '엄홍길'을 살려 보냈다. 산에서 내려가 또 다른 산을 오르란 뜻이리라.

엄홍길은 지금 '사람의 산'을 오르고 있다. 목숨을 담보로 오직 정상만 바라보며 8,000m 이상의 고산을 오를 때와 사뭇 다르다. 때론 더 힘겹고, 더 외롭고, 더 험한 길이지만 '살아남은 자'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걷고 있다.

"죽음의 산에서 로프 하나에 매달려 있을 때 히말라야 신에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수없이 빌었다. 내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시고, 생명을 이어가게 해 주신다면 히말라야 고봉들이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되갚겠다고 했다. 단 한 순간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됐다."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6좌 완등자로 기록된 산악인 엄홍길(50)은 쉼 없이 도전하고, 목표를 달성했다.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했다.

1985년 에베레스트(8850m) 원정을 시작으로 2007년 5월31일 로체샤르(8400m) 정상에 설 때까지 22년 동안 용기와 희망을 갖고 38번이나 고산에 도전해 20번 등정하고, 18번 실패하며 얻은 깨달음으로 '엄홍길 휴먼재단'을 이끌어가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험한 인생의 산에 오르는 더딘 한 걸음이 우리를 꿈의 정상에 좀더 가까이 데려다 준다. 도전, 희망, 용기로 세상은 밝아진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숨과 같은 것이다.'

엄홍길은 지난 5월 출간한 책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의 첫 페이지에 '살아남은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지난 5월5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팡보체(4060m) 마을에 많은 셰르파족들이 모였다. 엄마 손을 꼭 잡고 2시간 이상 험한 산길을 넘어온 아이, 1시간 거리인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함께 했다. 히말라야에 처음으로 세운 휴먼 스쿨의 준공식이 열렸다.

"설산의 정상에 섰을 때처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고산 등반을 끝내고 시작한 첫번째 사업이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첫 결실을 맺었다. 앞으로 이 학교에선 60여명의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을 키울 것이다. 빵을 주기보다는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16좌 등정과 같은 숫자인 16개의 초등학교를 세워 나갈 계획이다."

엄홍길은 1986년 두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 나섰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식량 보급을 하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하산 도중 추락 사고를 당했다. 바위에 선명한 핏자국과 찢어진 옷자락, 배낭 등이 발견됐다. 열아홉살의 어린 셰르파 술딤 도르지는 열여덟살의 어린 신부와 홀어머니를 세상에 남겨두고 숨을 거뒀다. 그의 고향 팡보체를 찾아가 머리를 숙이며 다짐했던 것을 25년만에 실천했다.

휴먼 재단은 학교를 짓는 것으로 나눔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학용품은 물론 의료 지원을 위해 간호사를 상주시키고, 일부 선생님들의 급료까지 책임지고 있다.

간호사 밍마참지 역시 팡보체 출신이다.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하고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소아마비처럼 다리가 불편한 소녀였다. 밍마참지는 휴먼 재단과 인연을 맺고 뒤늦게나마 한국에서 수술을 받아 이젠 정상인과 다름없이 걷고 있다. 휴먼 재단에선 밍마참지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간호사 교육을 시킨 뒤 고향 학교에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학교만 지어놓은 뒤 후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봤다. 히말라야에 세워지는 휴먼 스쿨은 장기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는 구조로 관리할 계획이다."

두번째 휴먼 스쿨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오지 농촌 타루프에 짓고 있다. 지난 4월2일 기공식을 가졌고, 내년 2월 준공할 예정이다.

"팡보체 휴먼 스쿨은 해발 4000m가 넘는 곳이다 보니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건축 자재를 운반하는 일부터 건설 기술자 문제, 춥고 긴 겨울까지 겹치는 통해 공사 기간이 길어졌다. 그래서 재단 관계자들과 숙의 끝에 두번째 학교는 수도 인근의 농촌으로 결정했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엄홍길 휴먼재단은 무척 바빴다. 모 방송국의 인터뷰에 이어 산악 전문지의 취재 요청까지 빠듯한 일정 중에 엄홍길 대장을 만났다. 엄홍길은 현재 재단의 상임 이사이자 상명대학교 석좌교수, (주)밀레 홍보팀 상무이사, 대한산악연맹 대회협력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4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숲 등지에서 열리는 2010 드럼 페스티벌의 홍보대사까지 맡았다. 많은 시민들에게 서울시가 주최하는 타악 축제를 알리면서 히말라야에 초등학교를 건설하고, 산에서 세상을 떠난 산악인들의 유가족을 지원하고, 환경 운동 등을 펴나가는 등 휴먼 재단도 소개하려고 직접 나섰다.

"대외적으론 히말라야에 16개의 초등학교를 짓는 것이 주요 사업이지만 국내에선 청소년들에게 산을 통해 호연지기의 정신을 배우고,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게 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만들어가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단체 생활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하고, 함께 도전하는 정신도 가르치려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엄홍길은 22년 동안 히말라야를 곁에서 지켜봤다. 어느 곳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직접 체험했다.

"나는 더 이상 고산 등반을 하지 않지만 그곳의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할 것이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날 지구 온난화가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숨 쉬기 조차 어려운 높이의 산이 변하고 있다. 청소년 캠프나 강연을 통해 계속 알릴 것이다."

설산에서 내려온 지 벌써 3년째지만 엄홍길은 문득문득 안나푸르나(8091m)를 떠올린다. 시련과 좌절, 도전과 극복의 극한 경험을 모두 함께 한 산이기 때문이다. 4전5기 만에 성공한다.

1997번 3번째 도전 때는 셰르파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고, 1998년 4번째 도전 때는 마지막 캠프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설사면에서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치명적인 부상까지 당했다. 함께 로프를 매고 있던 셰르파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고를 당해 동료들의 도움으로 3일 동안 살인적인 추위와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하산한 뒤 수술을 위해 먼저 귀국해야 했다. 다시는 산에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재활했고, 마침내 1999년 봄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다.

"사고 순간 죽었구나, 여기서 끝나는구나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간절하게 신께 기도했다. 살려달라고 했다."

엄홍길에게 히말라야는 도전과 성공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수도의 공간'이었다.

"처음엔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14좌, 16좌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도전을 하다 보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꿈을 이룬 대가를 나눠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산악계는 '여성 산악인 최초의 14좌 완등자' 오은선의 칸첸중가(8586m) 등정 의혹으로시끄럽다. 선배 산악인으로서 엄홍길의 마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완등 여부를 떠나 오은선은 대단한 산악인이다. 등정 의혹이 외부가 아닌 산악계 내부에서 불거져 나온다는 것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진위 판단에 앞서 산에 오른 본인이 갔다고 하면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숨 조차 쉴 수 없는 설산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엄홍길은 히말라야에서 22년 동안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꿈과 희망을 배웠다.

이젠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려 한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