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책임진 100득점. 이는 이제껏 NBA 역사에서 최고 기록이다. 이 기록이 작성된 지 50년이 훌쩍 넘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다시 또 나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1962년 3월2일(이하 현지시각) 경기에서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그리고 1961~62시즌 오스카 로버트슨의 평균 30.8득점 12.5리바운드 11.4어시스트 시즌 트리플더블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던 기록들이다. 하지만 시즌 트리플더블은 2016~17시즌 및 2017~18시즌 러셀 웨스트브룩에 의해 깨졌다.

그렇다면 혹시 체임벌린의 100득점 기록도 깨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물론 아예 없진 않다. 하지만 체임벌린이 100득점을 올렸던 시대 배경과 현대 농구의 배경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그 달라진 농구 환경은 아무리 위력적인 선수라도 100득점을 올리기 정말 힘들게 만든다.

체임벌린이 100득점을 올렸던 당시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왜 현재 또는 미래에 개인의 100득점 경기가 나오기 힘들까. 그 힘든 기록을 체임벌린이 달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96년 50주년을 맞이해 NBA가 선정했던 위대한 NBA 선수 50인에 들었을 정도로 체임벌린은 굵직한 발자국을 역사에 남겼다. ⓒAFPBBNews = News1
▶팀의 169득점이 나왔던 경기

당시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현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169-147로 승리를 거뒀다. 최근 NBA에 있어서는 올스타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대량 득점 양상이다.

지난 시즌 4쿼터까지 한 팀의 최다 기록이 148득점이었다. 1월20일 오클라호마시티 썬더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로 이뤘다.

169득점은 NBA 역사에서 연장을 가지 않은 경기들 중 3번째로 가장 높은 팀 득점이다. 1958~59시즌 2월27일 보스턴 셀틱스 및 1990~91시즌 11월10일 피닉스 선즈가 각각 173득점으로 공동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그런데 하나 눈여겨 볼 점은 1961~62시즌이 이런 169득점이 나올 만한 때였다는 사실이다. NBA 리그 평균 득점이 가장 높았던 때가 1961~62시즌(109.4득점)이었다. 2017~18시즌은 32번째(106.3득점)다.

그리고 1959~60시즌부터 1961~62시즌까지는 리그 평균 야투 시도가 역사에서 가장 많았던 세 시즌이다. 평균 107.7회 야투 시도의 리그에서 워리어스는 2번째(111.6회)로 많은 야투 시도를 가졌었다. 그리고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에서는 115회를 가졌다.

2017~18시즌 리그 평균 야투 시도는 86.1회에 4쿼터까지의 최고 기록이 109회였다. 21세기 NBA 경기들 중 연장을 가지 않으면서 한 팀이 110회 이상 야투 시도를 가졌던 적은 단 세 번이다. 그리고 이 중 최고 득점이 110회 야투 시도 42.7% 야투율을 통한 126득점이다.

▶리그의 독보적인 거대 괴수 체임벌린

팀 득점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한 선수의 100득점 경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한 팀 4쿼터까지 NBA 최다 기록 173득점이 나왔던 두 경기에서 각 팀의 최고 득점자들은 각각 43득점 및 32득점을 올렸었다. 현재에도 보기 힘든 숫자들은 아니다. 다른 동료들의 득점 활약도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체임벌린은 당시 워리어스에서 유일하게 20득점을 넘겼던 선수였다. 63회의 야투시도를 가졌던 체임벌린 다음으로 야투시도가 많았던 동료는 18회의 폴 아리진이었고 16득점을 올렸다.

216cm 신장 124kg 체중, 현재 기준에서도 장신인 체임벌린은 당시 기준에서 정말 돋보일 수밖에 없는 신체조건이었다. 1980~81시즌부터 NBA 평균 신장이 더마 드로잔의 201cm라면 1961~62시즌에는 제임스 하든의 196cm이었다.

지난 시즌 30개 팀 리그에서 코트에 나섰던 7피트(213cm) 이상 선수들이 45명이었다. 반면 9개 팀 규모 1961~62시즌에는 체임벌린 포함 단 3명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체임벌린을 막았던 208cm 대럴 임호프와 206cm 클리블랜드 버크너가 버텨내긴 힘들었다.

이런 거구에 기동성 및 손끝 감각까지 겸비했던 체임벌린은 수비에 대해 큰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NBA 역사에서 개인이 60득점 이상 기록했던 적이 68회다. 여기에서 체임벌린은 100득점을 필두로 절반에 가까운 비중의 32회나 작성했다.

NBA 역사 시즌 평균 득점 순위에서 1위(50.4득점)부터 3위(38.4득점)까지 모두 체임벌린이 차지했던 데에는 이런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점이 컸다. 그리고 여기엔 시대 배경도 한몫했다.

▶체임벌린을 도왔던 시대 배경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 NBA에서는 매우 빠르게 공수 전환이 일어났다. 선수들이 전광석화처럼 달렸다기보다는 공격 진영 사용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현대 농구처럼 공격 전술이 몇 단계에 걸쳐 전개되지 않고 일찍 끝나곤 했다. 여기에다 체임벌린은 볼 터치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63회에 달하는 야투 시도와 32회에 달하는 자유투 시도를 가졌다.

그리고 당시 체임벌린은 48분 경기 내내 뛰었다. 최근과 달리 당시는 슈퍼스타들의 출전시간이 매우 많았다. 리그 전체 선수들 113명 중 10위까지가 평균 40분 넘게 뛰었다. 게다가 체임벌린은 평균 48.5분을 기록했다.

당시는 시즌 일정이 80경기였다. 그리고 80경기 모두 출전했던 체임벌린은 한 경기 40분을 제외하고 모두 48분을 채웠으며 연장까지 간 7경기까지 포함 평균 48.5분을 기록했다. 당연히 100득점 경기에서도 모든 시간을 뛴 체임벌린은 쿼터별로 1쿼터부터 23,18,28,31득점을 올렸다.

이런 시대적 배경은 1961~62시즌 정점을 찍었다. 당시 3년차였던 체임벌린이 양적 숫자들에서 커리어 중 정점을 찍은 데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유독 그날 경기에서 체임벌린의 자유투가 잘 들어갔던 행운도 작용했다. 자유투 성공률 커리어 54.0%, 1961~62시즌 50.6%를 기록했던 체임벌린이 당시 경기에서는 32회 시도 중 28개(87.5%)를 성공시켰다. 체임벌린의 커리어 1045경기 중 자유투 20구 이상 성공은 그 경기 한 번뿐이었다.

1999년 세상을 뜬 체임벌린의 장례식장에 걸렸을 정도로 그의 100득점 기념사진은 큰 상징성을 가졌다. ⓒAFPBBNews = News1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현대 농구에서 가장 빠른 농구를 펼쳤던 2017~18시즌이었지만 경기 당 야투 및 자유투 시도를 비교했을 때 결국 1961~62시즌보다 훨씬 느린 페이스를 기록했다. 그리고 정말 경기가 치열하게 펼쳐지지 않는 이상 한 선수가 코트 위에 계속 있지도 않는 최근 NBA다.

때문에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는 깨지기도 다시 나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볼 수 있다. 만약 나온다면 400명이 넘는 NBA 선수들 가운데 비교하기 힘든 독보적인 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마추어에서는 기량 차가 극심할 경우 200득점도 넘게 올린 사례가 있다.

1974년 2월 스웨덴의 소년 농구 대회에서 13세의 소년이 272득점을 올리며 기네스 기록을 작성했던 적이 있다. 당시 경기는 272-0으로 끝났었다. 그리고 폴란드와 크로아티아의 14세 미만 리그 경기들에서 각각 개인이 227득점 및 178득점을 올렸었다. 두 경기의 점수는 326-15와 187-70, 역시 정말 크게 기운 경기들이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일방적인 경기가 나오기 힘든 곳이 NBA다. 저마다 힘든 과정을 통해 세계 수준급 선수들이 모인 리그다.

물론 2005~06시즌 코비 브라이언트가 81득점을 올리며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음을 보여줬다. 당시 브라이언트는 122-104로 끝난 경기에서 41분56초를 뛰며 81득점을 올렸었다.

하지만 점점 승리를 위해 선수 관리를 엄격히 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경향을 봤을 때 48분 출전 100득점은 전설의 기록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스포츠한국 이호균 객원기자 hg015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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