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이재호 기자]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축구대표팀이 베이스캠프로 삼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북서부에 있는 ‘문화의 도시’로 수많은 문호들을 배출한 인구 535만명의 대도시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두고 있고, 블라디보스톡, 이르쿠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세 군데에 영사관이 있다. 러시아에는 교민 17만 명이 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영사관의 권동석(54) 총영사는 한국대표팀의 예선탈락에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축구대표팀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한인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죠.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님까지 러시아를 19년만에 국빈방문하셨으니 참으로 경사죠”라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달 23일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한러 정상회담, 한국대표팀의 월드컵 베이스캠프지로서의 자긍심까지 겹치며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 사회는 겹경사를 맞이했다. 직업 외교관인 권 총영사에게 한국대표팀과 문재인 대통령 방문이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 러시아와 동유럽권 내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들어봤다.

▶동유럽 전문가, 총영사되어 문화교류 꿈꾸다

외교부 내에서 권동석 총영사는 동유럽통으로 알려져있다. 1992년 외교부에 입사한 그는 1993년 우즈베키스탄 대사관 창설 요원 파견을 시작으로 26년여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폴란드 등 외교관 생활 대부분을 동유럽권에서 보낸 덕분에 구소련의 붕괴 후의 러시아에 대해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폴란드의 경우 1990년대 초반 대우그룹의 성공적인 투자로 인해 ‘한국은 대단한 나라’라고 인지되어 있죠. 하지만 제가 이탈리아를 갔을 때 외국인들은 한국의 존재를 거의 몰랐어요. 대부분이 일본, 중국만 얘기했죠. 그게 현실이었죠. 예전에는 동유럽권에 그나마 기업위주로 한국에 대해 인지가 됐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죠. 하지만 최근 10여년 사이 K팝과 한류를 위주로 상당히 한국에 대한 홍보와 인식이 커졌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이라고 할지라도 인지도는 20~30위권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20년전만해도 4~50위권 수준에서 최근 기업의 한국 진출과 K팝을 중심으로 한류가 함께 섞이면서 한국에 대한 위상이 많이 올라갔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동유럽권 위주로 활동하다 처음으로 러시아 본토에 입성한 권동석 총영사는 “민간과 함께 하는 공공 외교를 통해 한국의 고유 문화를 러시아에 꼭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오랜 외국생활을 하며 문화교류와 홍보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한국은 단기적인 K팝 정도만 인식되고 있다.

그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는 문화원을 설립해 여러 행사를 통해 꾸준히 러시아인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신의 3년 재임기간 동안 문화원 설립을 위한 예산이라도 받아 놓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말한다.

또한 러시아 내 소수민족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내에서도 80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고려인들의 지위 상승을 위해 노력할 뜻을 밝혔다.

“특정민족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그 나라를 인식하는 기준이 되지 않습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 내에서는 고려인 중상층이 많지만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 전체로 보면 고려인에 대한 처우 개선과 인식 전환이 필요한 곳이 많습니다. 고려인을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개선과 교류의 매개체로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연합뉴스 제공
▶러시아월드컵과 대표팀의 베이스캠프지, 교민사회 들떠

많은 교민과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월드컵 대표팀의 베이스캠프지로 선정되면서 현지 교민들은 상당히 기대했다.

지난 12일 대표팀이 사전 전지훈련지였던 오스트리아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을 때에는 FIFA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권동석 총영사와 교민 150여명이 선수단을 환영하기 위해 호텔을 찾아갔다.

FIFA 규정으로 인해 선수단과 직접 마주하진 못했지만 권 총영사와 교민들의 마음을 헤아린 신태용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최영일 단장 등은 자진해서 교민들을 만나 환영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권 총영사는 “선수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신태용 감독, 최영일 단장, 차두리, 김남일 코치 등 스타들을 보니 교민들은 참 기뻐했죠. 사실 해외생활을 오래해도 고국에 대한 향수와 현지 생활의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대표팀이 우리 도시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교민들에겐 지루한 일상 속에 오아시스같은 행복이죠”라고 말했다.

그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권 영사는 러시아가 한국의 기운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민들과 함께 한인식당에서 응원복을 입고 응원했다는 그는 "대표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교민들은 ‘잘했다’, ‘선전했다’며 그저 대표팀이 같은 러시아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있다는 것”이라며 큰 힘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축구대표팀에 기뻐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민들. 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방문, 한국의 유라시아 중재자 기대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통해 다시금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가 '북방정책'에 힘을 싣고 있다"고 소개한 권 총영사는 "그동안 우리가 러시아와의 관계에 소홀했다. 미국 등 우방국들이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외교를 하는 우리 정부가 러시아와 교류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정상회담을 통해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했다.

권 총영사는 남북러 3각 협력의 주요 사업 구상 가운데 철도 연결 사업 추진을 가장 기대하고 있다.

그는 2015년 외교부 남북러 협력 팀장으로 러시아에서 석탄을 열차에 실어서 북한의 나진을 거쳐서 포항 제철소까지 실어나르는 시범사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다음해 1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 모든 사업이 중단됐다.

권 총영사는 "남북러 협력 사업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이뤄내야 하는 숙제"라면서 "푸틴 대통령이 지난 3월 재선 성공 후 7년을 보장 받고 문 대통령을 국빈 초대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문 대통령도 이제 2년차에 접어들었다. 이번에 철도사업 등에 의견을 맞추면 남북러 3각 협력이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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