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FC 제공
[스포츠한국 부천=김명석 기자] 대부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응원보다는 ‘어떻게’라는 의구심이 앞섰다. 서울대 진학, 그리고 프로팀 입단. 공부로도, 축구로도 가장 높은 무대에 서겠다던 목표에 대한 현실적인 반응들이었다.

실제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방황도 겪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걸었다. 덕분에 그는 ‘서울대 출신의 프로선수’가 됐다. “그거 돼, 할 수 있어”. 주위의 의구심에 대한, 이정원(24·부천FC)의 답이었다.

“공부를 놓지는 말라” 어머니의 당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부모님의 지원 속에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어머니는 “잘 하지 않아도 좋으니, 공부를 놓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공부하는 축구선수’ 이정원의 시작이었다.

용인 백암중 진학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외박을 나와 과외까지 받았다. 축구화를 신을 때는 축구에 몰두하고, 책을 펼쳐야 할 때는 공부에 전념했다. 쉽지만은 않았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첫 번째 방황이 시작됐다.

이정원은 스스로 “힘들어 죽겠는데, 나는 국가대표가 목표인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시험기간, 일부러 답안지를 일(一)자로 그어 제출하기도 했다. 부모님에게는 “자신이 있으니, 축구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용인 백암고를 거쳐 인천 부평고로 전학할 때까지, 1년 반 정도 펜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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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잘 뛰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특성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고교시절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도 출전하는 등 실력은 인정받았다. 다만 어느 순간 축구선수로서의 길에 회의가 찾아왔다. 합숙·기합 등 여러 문화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쉽지 않은 프로진출의 문 등 현실적인 고민이 더해졌다. 덮어뒀던 책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목표를 잡았다. 서울대였다. ‘우리나라 축구 환경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서울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교육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불합리한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두 가지 환경이 모두 마련된 곳은 서울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웃어 넘겼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달렸다. 하루 세 차례 훈련으로 몸이 녹초가 된 상황에서도,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다른 축구부원들이 잠든 시각 홀로 책을 펼쳤고, 그 다음날 다시 훈련장을 찾았다. 저녁훈련 일정을 조정해 야간자율학습에도 참가했다. 축구와 공부의 병행이 쉽지 않았으나,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묵묵히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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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렸던 실패 딛고, 다시 일어서다

공공연히 서울대를 목표로 내건 터라, 다른 대학 진학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고3 막판,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서울대에 지원했지만 불합격했다.

축구선수로서의 길도 막혔다. 당시 60kg대에 그쳤던 체중으로는 프로의 문을 두드려볼 수 없었다. 이정원은 “인생의 실패를 처음 경험해봤다”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인생에 스크래치도 많이 났다. 축구와 공부 모두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됐다. 답이 안 나왔다”고 했다.

두 번째 방황이 시작됐다. 두 달 가량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축구화도 모두 버렸다. 그러다 방황하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우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그때 마음을 다시 잡고, 재수학원에 등록해 다시 도전했다”고 돌아봤다.

축구는 잠시 접어뒀다.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꾸준히 공부를 해왔던 것, 축구로 다져진 체력이 밑거름이 됐다. 특기자 수시전형을 통해 다시금 서울대의 문을 두드렸다. 내신, 자기소개서를 통한 1차관문과 실기와 면접(교직적성·일반)의 2차관문, 그리고 수능 최저등급(4등급) 이상의 성적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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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날,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그리고 서울대 축구부. 공부하는 축구선수의 길을 걸어온 그의 새 소속이었다.

다만 무언가 허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이 아른거렸다. 이정원은 “축구를 시작할 때는 국가대표가 돼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중학교 때는 프로입단, 고등학교때는 대학진학으로 바뀌었다. 꿈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축구를 더 해보고 싶다”는 꿈을 다시 품었다. 가족들은 “누군가가 정한 틀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설득했고, 교수들에게도 “프로팀에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당시 교수님들은 한숨과 함께 ‘공부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하셨다”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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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축구에 던진 ‘메시지’

기회가 찾아왔다. 테스트를 거쳐 부천의 동계훈련에 참가하라는 답을 들었다. 그는 “마지막 축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보여주지 못하면, 더 이상 축구는 없다는 각오로 뛰었다”고 돌아봤다.

동계훈련을 마친 뒤, 계약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정갑석(48) 부천 감독은 “훈련태도가 워낙 좋았다. 늘 성실하게 운동했다”며 그에게 손을 내민 이유를 설명했다. 이정원은 “서울대는 ‘목표’였다면, 프로팀 입단은 나에게 ‘꿈’이었다. 너무 좋았다”고 했다.

서울대 출신의 프로선수가 나온 것은 1988년 황보관(52) 1989년 양익전(51) 이후 27년 만이다. 최근 ‘공부하는 축구선수’의 현실성에 대한 축구계의 고민이 깊은 가운데, 상징성이 있는 서울대를 거쳐 프로에 입단했다는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나아가 그는 지난달 18일,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프로 데뷔전도 치렀다. 상주상무와의 FA컵에 수비수로 선발 출전했다. 그는 “긴장이 많이 됐다. 그래도 좋은 기회라고, 잃을 것이 없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정원은 또 다른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정원 방 한 켠에 붙어있는 목표. 이정원 제공
갈 길은 남았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 그는 “은퇴하면 사업가가 되고 싶다. 이 사회, 특히 축구계에 영향을 끼치는 리더가 되고 싶다”면서 “나처럼 ‘공부하는 축구선수’를 위해서 건물을 세운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덧붙였다. 이정원은 “결국 본인의 선택이다. 욕심이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축구도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본인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공부하는 축구선수가 과연 될까라는 반응이 많았다”면서 “지금은 ‘그거 돼,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웃어 보였다. 한국축구계에 그가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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