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가을이 되면서 본격 사회 초년생들의 취업도전기가 시작되는 공채시즌이 다가왔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과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취업문은 갈수록 좁아진다는 전망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경쟁에서 승리한 이는 나오겠지만 많은 이들이 취업낙방을 통해 사회의 쓴맛을 볼 것으로 보인다.

체육계도 마찬가지다. 많은 선수들의 거취는 실제로는 내년 1,2월에 결정되지만 지금쯤 아마추어선수든 프로선수든 물밑 협상으로 자신의 거취를 정하게 된다. 축구의 경우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선수들은 대학이나 프로행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자신의 처지에 한숨 쉬거나 아예 포기를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그 어떤 선택이든 소중하지만 확실한 미래가 없다고 해도, 당장 실력이 안된다고 모두가 생각해도 자신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왼쪽부터 김병지, 제이미 바디, 에반 게티스. 스포츠코리아 제공 ⓒAFPBBNews = News1
K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를 나서고, 가장 오래 선수생활을 한 김병지도, 지난 시즌 전세계를 강타한 ‘레스터 신드롬’의 중심에 있던 제이미 바디도, 그리고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30홈런을 쏘아올린 에반 게티스가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조금은 느리게 걸어온 길을 함께 둘러보면 끝까지 자신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김병지 : 실력 없어 대학도 못가 공장 취업… 홀로 운동해 프로 데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축구를 했지만 두드러지지는 못했던 김병지는 고교 졸업 후 자신을 찾는 프로는커녕 대학팀도 찾지 못했다. 축구는 하고 싶지만 생계는 막막했던 김병지는 엘리베이터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검사실에서 볼트, 너트, 와이어로퍼부터 엘리베이터 문짝까지 부품에 대한 품질 검증을 진행하는 업무를 봤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직장인 팀에서 공을 차던 김병지는 만 20세가 눈앞이던 1989년 군대를 가야만했다. 이때 21세의 당돌한 김병지는 상무 테스트에 도전한다. 프로나 대학경력도 없이 상무 테스트를 보는 패기는 꾸준히 직장인팀에서 뛰며 남몰래 훈련을 한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했다.

당시 골키퍼라는 포지션이 아무래도 전문성이 부족했기도 하기에 일반인으로서 상무 입대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를 만든 김병지는 상무에서 첫 실전훈련을 받으며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군복무를 했다. 상무 제대 후 김병지는 어엿한 축구선수로서 태가 날 수 있었고 울산 현대에 입단하며 프로선수로서의 꿈을 이뤘다.

이후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1998, 2002 월드컵 멤버, K리그 베스트 11 4회수상, K리그 우승, K리그 통산 최다인 706경기 출전, 45세까지 선수생활이라는 한국을 넘어 세계 축구사에 남을 전설이 됐다.

김병지의 은퇴식 장면. 프로축구연맹 제공
▶제이미 바디 : 의료기구 만들던 7부리거, EPL 우승을 하다

고향팀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15세까지 유소년팀에 있었으나 실력미달로 방출됐다. 현재도 8부리그팀인 스톡브릿지 파크 스틸이라는 팀에서 선수생활을 근근히 이어갔다. 그 역시 김병지처럼 낮에는 공장에서 의료기구를 만들었고 일과 후에는 축구팀으로부터 주급 5만원을 받으며 살아갔다. 일과 후 햄버거를 먹고 축구만 하던 단순 생활을 하다보니 늘어나는건 축구실력뿐이었다.

아마추어인 7부리그에서 6부리그, 6부에서 5부리그로 조금씩 높은 팀에서 자신을 찾게 되고, 불과 4년전인 2012년만해도 5부리그에서 뛰다 2012년 여름, 당시 챔피언십(2부리그)에 있던 레스터 시티로 이적하게된다. 만 25세에 정식 프로선수가 드디어 된 것이다.

바디는 2013~2014시즌 챔피언십에서 16골을 넣더니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무려 24골을 넣으며 고작 한골차이로 득점왕 등극에 실패한다. 무려 4년전만해도 5부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득점왕을 노리는 것은 물론 팀을 리그 우승까지 시킨 것이다.

ⓒAFPBBNews = News1
▶에반 게티스 : 청소부 인증한 맨손 타자, 30홈런을 쏘아올리다

종목은 다르지만 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이와 비슷한 스토리의 스타가 탄생했다. 에반 게티스는 고교시절 유망주였고 이에 텍사스A&M 대학으로부터 야구 장학금 제안을 받을 정도는 됐다. 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한 게티스다. 그 이유는 대마초(마리화나)와 알콜에 의존하던 자신의 사생활이 대학에서 들통날까봐였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재활 치료소에도 가보고 사회 복귀 훈련 시설에서도 생활한 게티스는 일단 뭐든 하면서 살기 위해 일자리가 있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발렛 파킹, 트럭 세일즈맨, 피자 배달부, 스키장 리프트 요원, 골프장 카트 보이, 청소부 등 그야말로 약 4년여간 마약과 술을 잊기 위해 20대 초반을 일용직으로만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자 야구를 다시 시작했고 2010년 신인 드래프트 23라운드에 지명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마이너리그팀에 입단했다. 말이 23라운드지 그해 704번째로 이름이 불린 선수였고 그의 나이는 상당히 늦은 24세였다.

2010년부터 시작한 마이너리그 생활을 약 3년여간 끝내고 2013년 그는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타격을 할 때 글러브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타격을 하는 그는 포수 특유의 큰 덩치와 강력한 파워를 앞세웠다. 첫해부터 21홈런을 기록한 게티스는 올해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무려 32홈런을 때려내며 거포로 완전히 인정받았다.

현재 그의 SNS에 들어가면 프로필 사진이 자신이 한 건물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시절 이용하던 아이디 카드다. 게티스는 메이저리그 최고 거포 반열에 들어갔음에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

에반 게티스의 SNS 프로필 사진. 청소부 시절 아이디 카드다
결국 김병지나 바디, 게티스처럼 먼 길을 돌아간다 할지라도 그 목표가 명확하며 배신하지 않는 땀을 가치를 믿는다면 기적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이들의 성공이 더 놀라운 것은 갈수록 조기교육이 중요해지고 엘리트코스를 밟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스포츠계에서 신데렐라 스토리를 썼다는 점이다.

물론 ‘노력만 하면 못할게 없다’고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인생사는 정말 몇백, 몇만분의 1에 해당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준 ‘돌아가더라도 올바르게’ 걷는 길의 가치는 이제 공채시즌에서 쓴맛을 맛볼, 프로나 대학팀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아마추어 유망주들에게 분명 가슴 한켠 찌릿함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한국은 매주 '스한 위클리'라는 주말 특집기사를 통해 스포츠 관련 주요사안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해드립니다. 이 기사는 종합시사주간지 주간한국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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