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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김명석 기자] 지난달 26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축구대표팀 명단 발표 기자회견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 관계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떨림이 느껴졌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감정을 추스른 이 관계자는 “이광종 전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이 오늘 오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향년 52세,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던 그의 별세 소식에 기자회견장 분위기 역시 숙연해졌다.

풀뿌리축구, 지도자 이광종의 첫 걸음

고 이광종 감독은 현 축구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을 발굴하고 길러낸 지도자다. 손흥민(24·토트넘 홋스퍼)을 비롯해 지동원(25·아우크스부르크) 권창훈(22·수원삼성) 등이 청소년대표팀 시절 이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찾고 길러내는데 큰 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로 평가를 받아왔다.

물론 그 능력을 발휘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선수 시절 그는 유공과 수원삼성에서 266경기에 출전했지만,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지는 못했다. 1987년 국가대표 2진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뿐 끝내 대표팀과 인연이 닿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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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한 국가대표팀 경력으로는 지도자로서의 출발점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광종 감독은 그러나 큰 무대만을 좇지 않았다. 2000년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 1기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른바 ‘풀뿌리 축구’를 무대로, 그는 자신의 첫 갈음을 내디뎠다.

이 감독은 확고한 지도철학을 가지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어린 선수들과 만났다. ‘즐거운 축구’를 통해 어린 선수들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억압적인 분위기보다 선수들이 스스로 축구를 즐길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는 “재미있고 즐거운 축구를 하면, 자연스럽게 창의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구심 지워버린 연령별 대표팀의 값진 결실들

시간이 흐르면서, 이광종 감독은 지도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2년 15세 이하(U-15) 청소년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연령별 대표팀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19세 이하(U-19) 20세 이하(U-20) 청소년대표팀의 수석코치도 함께 역임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수석코치로서 그는 2002년과 2004년 U-19 대표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우승에 힘을 보탰다.

자연스레 기회가 찾아왔다. 2008년 16세 이하(U-16)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이듬해 17세 이하(U-17) 나이지리아 청소년 월드컵에 나섰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첫 결실을 맺었다. 한국 청소년대표팀을 22년 만에 대회 8강으로 이끌었다. 손흥민이 두각을 나타냈던 대회이기도 했다.

콜롬비아 보고타 에스타디오 엘 캄핀 경기장에서 열린 2011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과 콜롬비아의 경기에서 패했지만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팀 이광종 감독이 경기 후 퇴장하는 선수들을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이광종호’의 순항은 계속됐다. U-20 대표팀을 이끌고 아시아와 세계무대에서 거듭 결실을 맺었다. 2011년 콜롬비아 U-20 월드컵 16강, 2012년 AFC U-19 챔피언십 우승, 2013년 터키 U-20 월드컵 8강을 이끌었다. 풀뿌리 축구부터 시작한 이 감독은 차근차근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면서 거듭 꽃을 피웠다.

덕분에 그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23세 이하(U-23)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다만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았다. 전력 자체도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청소년대표팀과 U-23 대표팀은 분명 다를 것이라며 그의 지도력에 의구심을 품는 시선도 잇따랐다.

이광종 감독은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외부의 흔들림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만의 팀을 꾸려갔다. 결국 그가 이끈 한국은 28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했다. 의구심 속에 U-23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그는 어느덧 2016 리우(브라질) 올림픽을 이끌 선장으로 낙점을 받았다. 오롯이 이 감독 스스로 일궈낸 결과였기에, 그 결실은 더욱 값졌다.

2014년 10월 2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북한에 승리해 금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이 이광종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 지켜지지 못한 약속

다만 그의 앞길에, 뜻하지 않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웠다.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에 부임한 뒤 석 달 만이었던 지난해 1월, 태국에서 열린 킹스컵 대회 도중 고열 증세로 중도 귀국했다. 진단 결과는 급성 백혈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올림픽을 향한 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와 맞서 싸웠다. 축구계도 한 마음으로 그의 쾌유를 빌었다. 그해 3월 대전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A매치 친선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은 ‘COME BACK TO US(우리에게 돌아와 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축구팬들 역시 헌혈증서를 통해 이 감독을 응원했다.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본격적인 항암 치료에 들어간 이광종 전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쾌유를 기원하는 축구팬의 헌혈증이 대한축구협회로 전달됐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12일 "축구팬이 이광종 감독의 쾌유를 비는 내용의 편지와 헌혈증 10장을 보내왔다"며 "조만간 이 감독의 가족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제공
그 역시 힘을 냈다. 강원도 모처에서 요양에 주력하면서 복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지난 1월에는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근황도 전했다. 육성만 공개된 이 자료에서 그는 “많이 좋아지고 있다. 몇 개월 뒤 운동장으로 복귀해서 한국 축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 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병세가 다시 악화된 이광종 감독은 26일 오전, 결국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그의 별세 소식에 축구계도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제자’ 손흥민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이광종 감독님은 저에게 값진 가르침과 여러 좋은 기억을 선물해주셨고, 그동안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하셨다”면서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시라”고 했다. 울리 슈틸리케(62·독일) 성인대표팀 감독도 “오랫동안 헌신한 분을 보내드려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한국 축구를 가장 뿌리 깊게 이해하던 이광종 감독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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