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여전한 '힘의 논리'… 폭력은 소리 없이 인격 갉아먹는 괴물
폭력과 사과 반복하며 만성 폭력으로 발전… '2차성폭력' 뒤따르기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은 평판에 민감… 약점 내보이기 극도로 꺼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습니다. 한국아이닷컴 자료사진
# 최근 MBC 간판 앵커로 활약하는 김주하씨의 이혼 소송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김씨가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결혼 9년 만에 이혼을 택한 이유는 '가정폭력'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다며 남편을 고소했고, 김씨의 시어머니는 김씨를 존속폭행 혐의로 신고했다. 사건 내용이 알려진 후 김씨는 "죄송하다"는 짤막한 변을 남겼다. '여대생이 닮고 싶은 여성'으로 꼽히는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김씨를 둘러싼 소식은 사실 여부를 떠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 초등학교 교사 정현숙(가명 39)씨는 지난 5년간 남들에겐 말 못할 고민을 끙끙 앓다가 최근 한 가정문제상담소를 찾았다. 공무원인 남편은 성격이 수더분하고 인상이 좋아 주위에서 평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남편은 술만 먹으면 돌변하는 '주폭'이다. 신혼 초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남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올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말이 오갔다. 다음날 아침이면 남편은 '생각나지 않는다'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지만 정씨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곪아갔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데 이어 가정에서도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성들은 '요즘은 여성 상위시대가 아니냐' '나는 집에서 꼼짝도 못한다'고 푸념하곤 한다. '똑똑한 여자'를 '드센 여자'로 판단하는 고리타분한 시대는 지났지만 힘의 논리는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폭력이라는 '힘'이 작용한다면 똑똑한 여자도 한없이 작아질 수 있다. 가정폭력은 소리 없이 인격을 갉아먹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인재근 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1∼7월 총 9,571건의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아내 학대 71%(6,750건), 남편 학대 4%(408건), 노인 학대 3%(311건), 자녀 학대 2%(178건) 순이었다. 폭력 유형별로는 정서적 폭력이 42.8%로 가장 높았고 방임(30.8%), 가벼운 신체적 폭력(16.3%%), 성적학대(10.4%)가 뒤를 이었다.

가정폭력의 대부분은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다. 한국 정서상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로 취급되곤 하지만, 때로는 '칼로 살 베는' 극한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한다. 가정폭력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여성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폭' 남편에게 5년간 언어폭력을 당한 정씨는 "남편의 입에서 처음으로 '미친 년'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남편과의 문제를 털어놓고 싶었지만 주변에 알려지는 건 치욕으로 느껴졌다. '정 선생 남편이…'라는 얘기로 손가락질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는 더 사이좋은 부부인 척 행복한 척 행동했다"고 말했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은 대개 평판에 민감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걸 꺼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부 사이의 문제도 쉬쉬하게 된다. 주변인 뿐 아니라 부모와 시댁 등 가족 간에도 문제를 철저히 감추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한 '쇼윈도 부부'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한 가정문제상담소 관계자는 "가정폭력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남편은 가해자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 여성 특유의 정서상 자기애보다 모성애가 강한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결국은 자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 자녀가 정서적으로 불안을 겪는 건 물론 성인이 됐을 때 다시 '가정폭력 사범'이 되는 불행이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말했다.

'때리는 남편'의 적반하장 격 태도는 여성을 더 주눅 들게 만든다. '미친 영어'라는 영어학습법의 창시자인 중국의 스타 영어 강사 리양(李陽)은 부인에 대한 상습적인 폭력이 문제가 되자 TV에 출연해 "나 말고 많은 중국 남성이 부인을 때린다"고 해명해 '미친 남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최강현 경찰청 가정폭력분과 정책자문위원은 "부부사이의 폭력은 사과와 폭력을 반복하며 만성 폭력으로 발전한다. 부부관계에서도 '2차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수치심을 느낀 여성이 더 입을 다물게 된다"면서 "폭력은 법이 정하는 확고한 이혼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이 수면에 드러난 뒤 발생하는 보복 폭력도 문제다. 지난 9월에는 아내를 폭행해 법원에서 상담위탁 처분을 받은 박모(62)씨는 상담교육기간 중 아내를 또 폭행해 구속 기소됐다. 박씨는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상담까지 받아야겠느냐"며 아내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법무법인 신세계로의 조인섭 변호사는 "배우자의 폭력을 경찰에 신고하거나, 이혼을 결심할 때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혼소송기간 중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이나 피해자보호명령을 받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후적인 방법이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원스톱지원센터나 상담기관에서 바로 조치를 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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