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버닝의 S다이어리]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사랑과 사랑 이외의 것들. 이를테면 일이랄지 돈이랄지 뭐 그런 것들과 사랑 중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면 사람들은 뭘 선택할까?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다 사랑을 포기한다. 왜냐면 사랑 같은 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다 던지고 포기하는 건 영화나 소설 속에나 있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엔 인간은 너무 현실적인 동물이다.

지난주 토요일. 내가 아는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왔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밥을 먹는 자리에서 몇몇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작게 속삭이는 말은 다 한결같았다.

'그 남자가 아니네?'

그녀에게는 오랜 연인이 있었고 우리는 그녀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그와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서 결혼 서약을 한 남자는 다른 남자였다. 우리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 남자는 금테 안경을 끼고 조금 나온 배를 애써 감추며 그녀 옆에서 한없이 어색해 보였다.

뭐하는 남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지인 하나가 말했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두어 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집안에 늘 현금이 넘친다고. 놀라운 사실은 그는 초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 부인과 아이가 하나 있는데 지금 미국에서 조기유학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행복해보이지도 그렇다고 불행해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그날 그녀의 표정을 이야기하라면 어딘가에 쫓기는 사람처럼불안해 보였다.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며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초조해 보였다. 신혼 여행 중 그녀는 나에게 한통의 문자를 보냈다.

선배는 나 이해하지? 선배가 그랬잖아. 사랑은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라고. 내가 그랬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진짜로 사랑은 환상이고 결혼은 현실이니까. 하지만 어떤 게 더 우위라고, 그러니까 환상은 현실보다 못한 것이니까 현실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희생시켜야 한다고는 말 하지 않았었다.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유치해 보인다. 뭘 모르는 것 같고 아직 고생을 덜 해봤구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들은 좀 아둔한 족속들 같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상황에서 사랑타령 할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사랑도 배가 불러야 한다고 외쳤었던가?

아마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지독한 현실주의자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난 늘 어떤 상황에서도 사는 게 우선이라고 믿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스무 살 때. 태어나 처음으로 가출을 했었다. 너무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를 계속 좋아하려면 가출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남자는 가난했었고, 별 볼일 없었고, 신학대학생이었으니까.

나는 남자의 아이도 가졌었다. 하지만 낳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수술대위에 오르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내 몸을 돌보지 않아 그렇게 되었으니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나는 산부인과에서 꽃무늬 월남치마로 갈아입고 어금니를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사랑 하나로 모든 걸 이겨 낼 자신은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없었으니까.

이런 스토리의 끝이 다 그렇듯. 나는 엄마의 손에 끌려 집으로 돌아왔고 매질-머리 깎임-감금의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나를 빨리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선 자리를 알아왔다.

'통장에 10억이 있다더라'

이게 엄마가 그 남자에 대해 얘기한 전부였다. 지지리 가난한 집안의 첫째인 나는 살림 밑천이여야 했으니까. 그때 곱게 엄마 말을 듣고 선 자리에 나갔더라면 지금쯤 그 통장의 10억은 20억 혹은 30억이 되었을까?

한때 내가 독신을 꿈꿨을 때. 나의 모델이 되었던 선배가 있었었다. 능력 있고 잘 나가던 그녀는 그러나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나를 배신했다. 니들도 젊고 빵빵할 때 알아서들 시집가 내 꼴 나지 말고. 그녀의 꼴이 어때서? 그리고 이왕이면 결혼이지 시집이 뭐야 라고 생각했던 건 나 뿐만은 아니었다. 그날 나는 독신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화장실에서 데낄라와 나초와 위액이 범벅이 된 무언가를 토했다.

내가 사랑을 위해 뭘 버렸던 적이 있었을까? 남자를 만나 그 남자에게 푹 빠져있을 때도 나는 늘 그들에게 말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난 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그게 어디 일 뿐이었으랴. 아마 난 다른 것도 다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난 뭐는 해야 한다고. 또 뭐는 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아마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사랑보다 일이, 현실이 더 소중한 정말 똑똑하고 잘난 여자라구 라면서 말이다.

지금 내게 사랑을 위해 뭘 포기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아마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낫살이나 먹었으니 단지 멋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는 게 무서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 아무도 나에게 사랑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도 그러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사랑을 위해 뭘 포기해 버리면 그들도 무서워져 버릴 테니까.

젊고 예쁜 얼굴을 무기로 내 남자 친구와 결혼한 스물다섯 살짜리 여자는 참으로 잘 살고 있다. 그는 하던 음악을 때려치우고 그녀를 위해 회사 사장님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루이뷔통 핸드백도 사주고 디올 핸드백도 사주고 아기 낳느라 머리가 빠진 그녀를 위해 100만 원짜리 헤어 클리닉도 끊어줬다.

그는 담배를 손에 들고 술잔을 마저 비우면서 말했다. '너 혹시 나랑 바람 필 생각 없냐?'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네일 케어를 하는 아내를 위해 청담동에 있는 미용실까지 태워다주며 자상한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그는 불행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래야 세상이 공평한 거라고 말해줬다. 젊고 예쁜. 무려 여섯 살이나 어린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쯤은 해야 한다고.

내가 알기로 그는 한때나마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사랑을 얻고 나니 그게 시시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했겠지. 그게 자유건 돈이건 여자건 말이다.

별로 춥지 않은 겨울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사계절이 없어진단다. 초등학교 때였나? 교과서에 '아름다운 우리나라' 라는 대목이 있었다. 거기에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이유는 산천이 푸르고 어쩌고 와 함께 사계절이 뚜렷해서라고 쓰여 있었다. 아직도 그게 거기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아름다운, 그래서 외국인들이 찬사를 자아내는 나라는 아니다.

겨울인데 안 추우니까 자꾸 가을 같은 느낌이 든다. 늙어 꼴값을 하느라 그런지 가을을 탄다. 가을을 타면 사랑하고 싶어지는데 큰일이다. 최루성 멜로 영화나 보러 가서 영화가 슬프잖아? 라는 표정으로 한바탕 울고 나면 괜찮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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