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연애] 아파트- 고통은 로맨스의 제물일까?

작년부터 땅값이 한창 오르고 있는 경기도 모 지역에 사는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 하나.

선배네 근처, 입주를 몇 달 앞둔 대규모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아파트 공사장 근처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하던 여자가 며칠 실종되었다가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부검에 의하면 강간 후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서는 우선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은 유야무야 덮여 버렸다고. 선배 말에 의하면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이 경찰과 피해 가족들을 구워삶았다는 것. 피해자 가족들에겐 회유가 안 되자 협박까지 했다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물론 딱 한 가지 때문이다. 살인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면 아파트 시세가 떨어진다는 것.

선배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아파트 시세'야 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공포 아이콘이구나.

영화 '아파트'에는 '아파트 시세'와 관련된 폭력이나 광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 도시에서 아파트가 오랫동안 대변해 온 '단절과 고립'의 정서는 충분히 들어 있다. 아니, 이 영화에서 단절과 고립은 사건의 배후이자 영화의 주제였다. 그러나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절과 고립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죽은 사람들이 모두 한 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열쇠는 704호, 한 소녀의 집 열쇠다.

소녀는 다리를 못 쓰는데다 하루아침에 부모까지 교통사고로 잃어 천애고아가 되었다. 소녀의 부모가 사고를 당하자 소녀를 돌봐주겠다며 친절한 이웃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밥도 떠 먹여 주고 휠체어도 밀어주고 목욕도 도와주었다. 미담이 바람을 타고 퍼져 살기 좋은 아파트로 상도 받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친절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고운 얼굴의 할머니는 소녀가 주는 대로 꾸역꾸역 안 먹는다고 따귀를 날리고, 푸짐한 아줌마는 소녀를 찬물에 담궈 놓고 때수건으로 피가 나도록 밀어 버린다. 모범생 타입의 남학생은 소녀의 손을 묶어놓고 강간까지 시도한다.

물론 이들의 폭력성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소녀와 단 둘만 있을 때 발휘된다. 처음에는 순수한 동정심으로 시작했던 행동이 왜 이토록 끔찍한 폭력으로 변질되고 말았을까?

친절한 이웃이 잔혹한 이웃으로 변해 버린 이유... 그것은 그들이 소녀를 도와주기 위해 계속 접촉 하면서, 소녀가 '약자'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잠자리를 만져 보는 아이는 손을 떨게 마련이다. 개미를 손등에 올리면서도 식은땀을 흘리게 된다. 그런데 잠자리와 개미가 익숙해지고 이것들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날개를 떼고 물에 빠뜨리는 행동을 시작한다. 상대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폭력성이 고개를 치켜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적절한 대상을 만나면 그것은 언제 어느 때고 다시 부활한다. 부모가 없고 다리를 못 쓰는 소녀가 눈 앞에 있으니, 좋은 아파트에 사는 교양 있는 도시인들 역시 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 '아파트'에 등장하는 이웃들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도 저마다 감춰진 악마성이 있기 마련인데, 재미있게도 특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맹렬하게 발휘되기 시작한다.

친구 K양은 애인을 집안에 감금시키는 것이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사귀다 보면 서로에게 잘못을 할 때가 간혹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말실수를 하는 등등...

사실은 별것 아닌 일임에도 불구하고 애인이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 날이 도래하면 K는 기다렸다는 듯 애인을 벼랑 끝까지 닦달해 한참을 몰아세웠다. 그리곤 판관 포청천 처럼 엄숙하게 '감금형'을 선포했다. 만 24시간 동안 어떤 외출도 해서는 아니 되고 오로지 집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K양은 핸드폰을 압수하고 집 전화로 10분에 한 번 씩 확인전화를 했다. 애인은 꼼짝없이 집 안에서 K양의 전화를 받으며 만 하루를 보냈다.

집 안에서 티비보고 게임 하면서 하루 지내는 일이 뭐가 힘들겠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십분 마다 울리는 감시전화를 받으며 집안에 있다 보면 아무리 지은 죄가 많아도 기분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이 감금형이 K양의 기분 상태에 따라 수시로 발생한다는 것이 더 지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왜 그렇게 애인을 괴롭히냐고 물어봤을 때 K양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재밌잖아!"

사실은 내가 K양에게 뭐라고 할 처지가 못 된다. 나 역시 오래 전 지나간 남자2를 몹시 괴롭힌 적이 있었다.

어느 폭설 오던 날 밤에, 남자2가 옥상에서 맨발로 떨면서 수 십 분간 내게 '사죄'를 읍소했었지만 모른 척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었나, 이제와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정말 개미가 하품하고 지나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어디 그 것 뿐이었을까? 어쩌다 실수한 말을 꼬투리 잡아 엄청나게 크게 부풀리고, 그래서 그 부풀린 죄의 대가를 치르게 했던 일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던가?

그 시절 우리는 내가 고통 받는 척 해서 상대를 더 큰 고통에 빠뜨릴 줄 아는 계략을 터득하고 있었고 그것을 빌미로 상대의 고통을 헌사받기를 즐겨했다.

K양과 내가 그들을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약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약자가 되는 이유는 물론 그들이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 자의 오만함은 내가 아무리 괴롭혀도 그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게 마련이다.

고통은 로맨스의 제물이 되고 우리는 또 다시 확신한다. 제물이 커질수록 로맨스의 품질 역시 좋아진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고통을 제물로 바쳐 획득한 로맨스야말로 진짜라고 우리를 세뇌시킨다. 여자 주인공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이고 남자 주인공은 그 공주를 구해야 하는 기사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불을 뿜는 용과 싸우지 않으면 공주의 키스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상대가 가문의 원수이거나 혹은 부모가 눈에 안 찬다고 결혼을 반대하거나 상대에게 헤어져야 할 나쁜 애인이나 남편, 마누라가 없는 심심한 커플들은 급기야 불을 뿜는 용을 자체 생산해 내기에 이른다.

싸울 일도 아닌데 싸움을 유출해 내고, 괴로울 상황도 아닌데 필요 이상 괴로워하고,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헤어지네 마네 울부짖고, 다시 얼싸안는 상황들도 실은 나름대로 로맨스 감정들을 부풀리기 위한 '고통 생산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영화 '아파트'에서 소녀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원혼이 된 소녀에게 똑같은 꼴을 당한다. 억지로 밥을 떠 먹였던 할머니는 배 터져서 돌아가시고, 찬물에 담궈 때를 밀던 아줌마도 목욕탕에서 똑같은 꼴을 당한다.

어느 날, K양은 애인으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았다. 한 번씩 지독하게 구는 모습 때문에 결국은 정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애인과 헤어진 후 그녀는 오랜 시간 괴로워해야 했다. 애인을 그렇게 집에 가둬놓더니, 자신도 역시 실연의 고통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만 것이다.

나 역시 어느 추운 겨울 날, 남자2의 회사 앞에서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그는 한번 빼꼼 내다보지도 않고 나를 싸늘하게 외면했다. 인과응보는 공포영화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저지른 잘못들은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안타까운 건 공포영화에서 죽은 이들이 귀신을 향해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지 못했듯이, 우리 역시 끝나버린 관계들에게 제대로 용서를 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집안에 감금해서 미안하다고, 눈 위에 맨발로 세워둬서 미안하다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아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건, 공포영화가 끊임없이 시리즈로 재탕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똑같은 잘못들을 지금도 계속 복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로맨스의 제물이 될 상대의 고통을 요구하고, 상대가 불응할 시 '급 제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이치가 있다고 했다. 아파트 시세에 환장한 이들이 끊임없는 도시 괴담을 생산해 내는 것처럼 우리의 확장된 욕심이 관계의 파국을 가져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 이상의 로맨스 원혼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이러다 자폭하지 않도록... 어찌됐든 다들 겸손할 지어다.

* 본 기사는 반짝반짝 연애통신(www.yonae.com )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