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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포르노와 핑크영화
[일본서브컬처탐방] 로망포르노 - 제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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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로영화의 신노선을 강력히 들고 나온 것은 니카츠의 경영측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에 굶주려있던 노조측의 발상이었다. '괴물' 호리 사장이 퇴임하고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한 그의 아들이 촬영소 직원의 절반가량인 300여명을 해고하려 했다.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언제나 강경파의 자세를 유지하던 당시의 노조 위원장, 네모토 테이지 였다. "회사를 먼저 살립시다" 하고 그가 일변하여 들고 나온 것이 소위 [소형영화]였다. 직원들이 촬영소에서 소품용 목재나 촬영기구, 조명기구등을 훔쳐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판에 노측도 위기감을 누구보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에는 '육체노선'의 포르노 영화가 그려져 있었지만 사측에서 '포르노'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하자 임시변통으로 쓰던 용어가 [소형영화] 였는데, '소형' 이라함은 당시 제작되는 영화의 1/4 쯤 되는 제작비로 만든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1960년대말, 당시의 이른바 메이저 영화사들의 편당 제작비는 대략 3,000만엔 정도였다고 한다. 니카츠가 만들기로 한 로망포르노는 편당 700만엔 ~ 750만엔 정도로 예산이 편성 되었다.

'포르노'는 '포르노그라피'의 약어이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써, '창녀에 대해 쓰여진 것'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포르노 = 외설= 반사회적' 이미지가 강렬하기 때문에 니카츠는 로망포르노라는 말을 만들기는 했지만 사용하는 데는 상당한 논의와 주저가 따른 후였다. 때로는 애매하고, 때로는 유용한 이 '로망포르노' 라는 말은 그 후, 니카츠를 곤혹에 빠트리기도 하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겠다.

일본이 패전하기 전에는 많은 독립 프로덕션에서 뉴스나 기록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패전과 함께 뉴스를 대신해 찍은 것이 [육체노선] 영화로, 싸구려 에로 영화였다.

편당 제작비가 300만엔이었으니 싸게 만들어, 싸게 파는 시스템으로 꾸려 나가고 있었다. 심하면 200만엔에도 한편을 찍어내곤 했다고 한다. 이런 영화를 [핑크영화]라고 부르는데 니카츠를 비롯해 당시 메이저사는 규모만 다르다뿐이지, 이미 로망포르노 이전부터 에로영화는 꾸준히 제작되어 오던 터였다.

▲ 타카하시 아키라

아무리 싸구려로 영화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배우의 얼굴마저 싸구려를 쓸 수는 없었다. 당시 이런 상황은 1955년, 닛카츠의 전성기에 입사한 남자 배우 타카하시 아키라(高橋 明)에게도 예외 없이 닥쳐왔다. '절반의 예산으로 두 배의 관객을 부를 수 있다'는 로망포르노로 제작 노선을 바꾼다는 회사의 방침이 소문이 아니었음을 확인하자 그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다카하시는 16,7세부터 배우 구니타로,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의 오카모치(= 가방모치) 를 맡았고, 근처의 다카라 프로덕션을 출입했다. 다테시(무술감독, 특히 사무라이 액션에서 칼을 쓰는 모양과 전열 등을 연출하는 사람) 오오우치 류우세이에게 다테를 배우고,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을 하며 수업을 쌓아 온 니카츠 터줏대감 같은 배우였다.

하지만 아내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자식에게 설명 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배우로서의 자존심도 용서치 못했다. 그렇지만 ...... 밀려 있는 월급이 벌써 몇 달 째인가. 결국 타카하시는 남자 주인공을 맡게되고, 그것이 1971년 11월 닛카츠의 첫 개봉작인 「단지처 / 늦은 오후의 정사(團地妻 / ひる下りの情死)」였다.

타카하시가 71년 가을 스텝들과 주연을 맡기로 한 여배우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차 집에서 감독과 함께 아무리 기다려도 여배우는 오지 않았다. 여배우 같은 사람도 나타나질 않자 조감독에게 '여배우는 언제 오냐?'고 물어보자 조감독 오하라 (小原廣裕)가 당황해 하며 대답한다.

"아까부터 와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카운터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까무잡잡한, 어두칙칙한 여인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조연으로, 주연으로 공연해온 니카츠의 여배우들 (아사오카 루리코, 요시나가 사유리, 카지메 이코 등등)에 익숙해 졌던 타카하시에게는 상상도 못할 모습으로, 그저 스텝의 한 사람으로 오인 될 정도로 허술한 차림을 한, 한 여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 여배우가 시라카와 카즈코였다.

▲ 시라카와 카즈코

합석한 시라카와에게 타카하시는 '이 여자랑 정말 섹스신을 찍는단 말인가?' 하면서 니카츠 전속 배우로서 자신의 15년 경륜과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담아 시라카와에게 진지하게 로망포르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마치 카즈코와 정말 섹스라도 할 것처럼 진지하게...

시라카와 카즈코는 이미 이 때 200여 편의 핑크영화에 출연한 경륜이 있었고, 오디션이라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71년 니카츠로 사실상 스카우트 된 상황이었다.

면접 때 시라카와는 이렇게 비꼬았다고 한다. "5사(당시 메이저 영화사인 니카츠, 다이에, 토오호, 쇼치쿠, 토에이)는 지금까지 핑크(영화)를 업신여기더니 왜 이제 와서 핑크를 흉내 내려고 하나요?" 당시 면접관들은 손을 내두르며 '로망포르노는 핑크와 다르다'고 열을 올리며 설명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 핑크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의식적 차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핑크영화와 로망포르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본력이다. 둘 다 실제정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같지만 좀 더 많은 돈을 들여 찍는 다는 것만이 다를 뿐...)

핑크영화계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카츠에 입사한 시라카와 카즈코(白川和子)는 의상실, 긴자(銀座) 촬영세트, 메이크업 스텝 등을 보고 감탄한다. 각자가 알아서 화장과 의상을 준비하고 감독의 집에서 촬영하던 핑크영화와는 격이 틀렸다.

아무튼 전격적으로 주연에 발탁 된 시라카와 카즈코는 첫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평상복 차림에 게타를 신고 나타났다고 한다. 정문 앞에 스포츠카는 아니더라도 지금까지의 스타들은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스텝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카츠의 스텝들은 한편으로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라카와 카즈코가 핑크 배우로 천대시 당하던 아픈 상처를 안고 니카츠에 입성하게 되자 반발심이 도진 것이라고 이해하였다고.

훗날 이때를 회상하는 시라카와 카즈코는 "허리우드에 온 것 같았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한편, 실제 촬영에 들어가자 타카하시는 시라카와의 배 위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고... ^^ ;;;;

* 본 기사는 반짝반짝 연애통신(www.yonae.com )에서 제공합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제휴] 일본세포 일본 서브컬처 평론가 드니로 최

입력시간 : 2007/03/07 22: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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