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스포츠한국 최재욱 기자] 충무로에서 요즘 스토리텔링에 강점을 지닌 신인감독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상업적인 컨셉트와 비주얼에만 집중하느라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는 데 예전만큼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봉 후 호평세례가 쏟아지는 영화 ‘배심원들’의 홍승완 감독은 오랜만에 ‘스토리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선 굵은 연출로 평단과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영화 ‘배심원들’(감독 홍승완, 제작 반짝반짝영화사)은 2008년 국내 첫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을 소재로 갑작스러운 나라의 부름에 모인 8명의 배심원들이 좌충우돌하며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 법정물. 인생사 희로애락이 제대로 담긴 시나리오를 직접 쓴 홍승완 감독은 충무로에 오랜만에 실력 있는 이야기꾼의 등장을 알리며 관계자와 영화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개봉 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홍승완 감독은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에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은 있었지만 오랜 시간 준비한 영화를 드디어 개봉시킨 후련함과 만족감이 더 강해보였다. 홍승완 감독은 감독 데뷔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가족에 대한 고마운 마음부터 전했다.

“부모님이 아들이 오랫동안 돈도 못 벌고 뭐 하고 사는지 몰랐는데 드디어 결과물을 만들어내니 엄청 뿌듯해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은 제가 영화를 잘 못 만들었어도 좋아하셨을 거예요. 아내도 정말 기뻐해요. 결혼 후 제가 경제력이 없어 아내에게 기대고 살았는데 드디어 데뷔를 하니 감격스러운가 보더라고요. 흥행은 아쉽지만 일단 데뷔작이 개봉됐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은 확실히 있어요. 많은 감독 지망생들이 데뷔작은 과연 만들 수 있을까 걱정하는데 드디어 영화를 만들고 개봉까지 시켰네요. 마지막까지 좀 더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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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감독은 영화 ‘배심원들’에서 법정물이란 큰 틀 안에 코미디, 스릴러, 휴먼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넣어 웃음과 스릴, 감동을 선사한다. 이런 가운데 사회 구성원 모두 한번 고민해볼 만한 메시지까지 전달하며 영화의 품격을 올려준다. 홍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소시민의 위대함을 전하고 싶었단다.

“제가 원래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기존 질서가 엉망이 되고 흐트러졌다가 다른 방식으로 질서가 세워지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재미가 있더라고요. 어느 날 국민참여재판 기사를 보고 내가 찾던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옹성 같은 법원에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가 재판에 참여하면 소동이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결국 심판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죠. 사실 우리 사회는 아무리 평범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도 세상은 소수 엘리트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별거 아닌 걸로 생각하죠. 그러나 전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어요. 여러 사람의 생각이 모인 ‘집단지성’이 한 명의 엘리트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시민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위대한 힘을 느끼고 스스로 뿌듯해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가장 큰 바람이에요.”

영화 ‘배심원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더욱 끄는 이유는 명품배우들의 연기 앙상블 덕분. 첫 국민참여재판을 이끄는 재판관 김준겸 역의 문소리와 뻔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던 재판에 문제제기를 해 소동을 일으키는 8번 배심원 권남우 역의 박형식, 조한철 서정연 윤경호 백수장 조수향 등 연기파 배우가 대거 포진한 배심원단 등 출연 배우 모두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다. 한 캐릭터도 허투루 다루지 않은 홍승완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홍감독은 모든 배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사실 재판장 역할은 남자였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정미 헌법재판관, 김영란 대법관을 보면서 여자로 바꾸면 영화의 결이 더 다양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소리는 재판장의 성별을 바꾼 후 처음 떠올린 배우였어요. 연기를 우선 정말 잘하고 이 역할을 생명력 있게 연기해줄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체불가였어요. 박형식은 촬영 초반 많이 고생했어요. 사실 제작진이 추천했을 때 드라마보다 저에게 예능 ‘진짜 사나이’의 아기 병사 이미지가 강했어요. 그런 모습을 이끌어내면 남우 캐릭터를 생명력 있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 박형식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이끌어내고 싶었죠. 촬영 때 제가 자꾸 연기하지 말라고 하니까 혼란스러워하더라고요. 자신은 많이 준비해왔는데 말이죠. 문소리를 비롯한 선배배우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권남우 캐릭터를 완벽하게 만들어냈어요. 권남우 캐릭터가 저와 비슷할 것 같다고요.(웃음) 맞아요. 융통성 없고 고집 세고 눈치 없는 것이 많이 닮았어요. 오래 준비하다보니 시나리오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 제 모습이 조금씩 담겨 있어요.”

영화 ‘배심원들’에서 배심원들만큼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사건의 당사자인 소라네 가족. 피고인 역의 서현우, 노모 역의 이용이, 딸 소리 역의 심달기의 열연이 돋보인 결말부는 복지사각 지대에 놓은 우리 사회 이면을 보여주며 폭풍 눈물을 자아낸다. 홍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접한 열악한 소외계층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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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사건기록들을 봤어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많더라고요. 힘들고 어려운 소외계층은 형사사건에 연루가 되고 돈이 많은 분들은 대부분 민사재판에서 분쟁을 하시더라고요. 형사사건을 보다보면 유죄를 받아도 피고인을 욕하기 힘든 기구한 사연들이 진짜 많더라고요.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세 분이 연기를 실감나게 해주셔서 결말부 감정이 최고조로 올라갈 수 있었어요. 감사할 따름이에요. 소라를 연기한 심달기는 정말 기대되는 배우예요. 결말부 아빠 등을 때리는 장면은 본인이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원래 시나리오는 그냥 안아주는 거였는데 심달기가 자기라면 아빠 등을 때릴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죠. 심달기의 아이디어 덕분에 그 장면에서 많은 분들이 눈물을 더 흘리게 됐어요.”

홍감독은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 “아직 엄두도 못내고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심원들'이 극장에 걸려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후 다음 작품을 생각해볼 심산이다. 홍감독은 마지막으로 ‘배심원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시나리오 개발 초기 함께 작업한 영화 ‘영주’의 차성덕 감독을 언급했다.

“'배심원들'의 시나리오 초고를 쓴 후 2고 때부터 차성덕 감독과 함께 작업을 했어요. 정말 피 튀기게 싸우면서 즐겁게 작업했죠. 투자가 안 되면서 차감독은 ‘영주’를 연출하러 떠나고 좀더 시간이 지난 후 제작사가 잡히고 2년 더 시나리오 작업을 한 후 영화화가 결정됐어요. 차감독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이 기회에 전하고 싶네요. 차기작은 생각해둔 아이템은 있는데 시나리오는 아직 쓰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저는 우당탕 하는 소동극을 좋아해요. 모든 게 뒤죽박죽돼서 어그러져서 풍자. 해학. 녹아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법정물은 아니더라도 스릴러나 로맨틱코미디에서도 이런 설정은 담을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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