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컷
는 공간의 의미가 중요한 영화이다. 영화 속 설원은 차갑고 황량하며, 냉기가 서려 있다. 실제로 이 공간에 내포된 의미는 서늘하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미국 와이오밍 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 로키 산맥의 한 자락이며, 백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밀려난 종족의 허름한 거주지이다. 높고 가파르고 눈으로 뒤덮인 산맥과 골짜기는 대자연의 위엄과 함께 위험한 칼날을 숨기고 있다.

는 실제 지명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영화 속 사건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은 이곳에서 약 1년간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 경험을 영화에 담아냈다. 는 윈드 리버에 거주하는 인디언의 삶을 범죄 스릴러라는 영화 형식을 빌려 표현한다. 공간의 외형적인 특징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밀한 정서이다.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그들 사이의 유대감은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방문한 외부인의 삶까지 바꿔 놓는다.

에서 공간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이다. 먼저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특이성이다. 이곳에서 인디언들은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인디언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청년조차 술과 마약에 취해 산다. 그런데 이 윈드 리버 안에는 이질적인 공간이 있다. 백인들이 운영하는 정유 공장이다. 자연의 품에서 양과 말을 키우며 살아가는 인디언과 자연을 파헤치고 개발하는 백인의 대비가 뚜렷하다. 이 백인 노동자들은 고립감을 이기지 못한 채 야만적이 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 날 차가운 눈밭에서 젊은 인디언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영화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는 쉐리던 감독의 현재까지의 영화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쉐리던 감독은 이전 작품에서도 경계로서의 공간에 주목해 왔다. 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도시 후아레즈를 배경으로 한 FBI의 마약조직 소탕 작전을 그려냈고, 는 빚더미에 시달리다 은행 강도로 돌변하는 서부 텍사스의 두 형제의 삶을 담아냈다. 쉐리던 감독은 와 의 시나리오를 썼고, 에서는 시나리오는 물론 연출까지 도맡았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이른바 쉐리던 감독의 ‘국경 3부작’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경계지대 혹은 경계인들의 삶을 그린 ‘경계 3부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의 공간은 일차적으로 갈등과 대립의 전장이지만, 그곳은 또한 치유와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윈드 리버라는 공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번째 이유이다. 는 인종의 경계를 허물고 소통과 연대를 이루는 인물들에 관한 영화이다. 코리 램버트(제레미 레너)는 인디언과 백인의 삶을 동시에 공유하는 인물이다. 코리는 야생동물보호국 직원으로 맹수 사냥 전문가이다. 오프닝에서 그는 양떼를 노리는 늑대를 정확하게 사살한다. 양떼와 늑대는 인디언과 백인 관계의 은유이다. 코리는 백인으로서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다. 그는 인디언 여성과 결혼한 적이 있고, 여덟 살짜리 혼혈 아들을 두고 있다. 코리는 장인이 운영하는 말 목장을 습격한 퓨마를 찾아 나섰다가 인디언 여성의 사체를 발견한다. 의 핵심 서사는 이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새내기 FBI 요원 제인 밴너(엘리자베스 올슨)가 도착한다.

코리와 제인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및 결과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들이 살인용의자를 찾아나서는 발걸음은 나름대로 치밀하지만, 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가 뿜어냈던 강렬함과 긴박감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의 전개가 조금 밋밋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드니 빌뇌브 감독과 테일러 쉐리던 감독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작품에 담긴 메시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의 여성 FBI 요원 케이트 메이서가 끝내 야만의 세계에서 튕겨져 나오는 것과 달리 의 제인은 백인들이 야만인 취급하던 인디언의 삶과 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동화된다. 제인이 작전을 무사히 마친 후 병원 침대에 누워 갑자기 오열하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에서 제인의 변화를 이끌어낸 촉매제는 인디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족쇄를 차고 있던 나탈리의 죽음이다. 그리고 코리는 나탈리의 살인범을 찾아 나선 제인의 친절한 안내자가 된다.

우리는 흔히 크나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슬픔을 잊으라고 말한다. 슬픔을 극복하는 이런저런 방법들을 조언한다. 코리는 백인 노동자들에게 쫓기다가 설원에서 숨진 나탈리의 아버지에게 슬픔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코리에게는 나탈리의 친구였던 딸이 있었고, 그 딸도 나탈리처럼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코리는 그 상처와 슬픔을 받아들였다. 그래야 딸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을 기억하기 위해서 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나탈리의 아버지는 코리의 조언을 수용한다. 처음에 코리와 인디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인도 결국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FBI 요원이 인디언의 세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윈드 리버라는 공간과 코리라는 인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는 소란스럽지 않다.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은 대체로 절제돼 있다. 이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사건 해결의 스릴을 전해주고, 나아가 인물과 종족의 연대를 통해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구축한다. 는 변방의 차가운 오지에서 살아가는 경계인들의 삶 속에 인간의 온기가 흐르고 있음을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임정식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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