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현주가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오퍼스픽쳐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아직도 징크스가 있어요. 제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는 다른 영화를 안 봐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희한하게 못 보겠더라고요.”

올해로 데뷔 28년을 맞은 배우 손현주의 눈빛에선 여느 신인에게서 보일 법한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보통사람’(감독 김봉한)은 손현주의 첫 휴먼 드라마. 그의 전공분야라고 불리는 스릴러 못지않게 찰떡같은 장르다. 손현주는 인터뷰에 앞서 “잘 하고 싶고 잘 해내야만 하는 영화”라고 힘줘 말했다.

‘보통사람’은 1980년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강력계 형사가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린 이후 일생일대 위기를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손현주는 가족과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형사 강성진으로 분해 양심과 부성애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보통 아버지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사실적인 건 캐릭터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극 중 등장하는 장면들 역시 6월 항쟁,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살인사건 등을 떠올리게 한다. 격동의 80년대, 손현주는 연극을 사랑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제가 84학번이에요. 그 때 대학생들의 최대 화두는 등록금 인상 문제, 독재타도 같은 것들이었어요. 지금 같은 봄에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게 생각나죠. 저는 그 시대의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찍는 내내 생생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80년대를 대표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누군가한텐 목숨을 걸 만큼 처절한 시대였지만, 그런 사건조차 모르고 넘어간 사람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는 단편적이죠. 다만 저는 그때도 정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분위기에 민감했고, 덕분에 좀 더 세밀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어요.”

사진=오퍼스픽쳐스
80년대라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 탓에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장소 선정이었다. 80년대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을 찾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 찾은 곳은 재개발을 앞둔 곳이라 철거 하루 전날까지 촉박하게 촬영이 진행되곤 했다. “부산에 있는 집터도 겨우 사수한 곳이었어요. 촬영이 진행된 서울서부경찰서 구청사도 허물 계획이 잡혀 있었고, 사실 장소 뿐만이 아니에요. 솔직히 2~3년 전만 해도 여러 제약이 안 풀려서 투자도 거의 못 받고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회의를 거쳐서 타협한 지점도 있고 여러모로 아픔이 있는 영화에요.”

녹록지 않은 제작 환경이었지만 손현주가 2년이나 기다려가며 ‘보통사람’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사람 냄새 나는 시나리오, 그리고 좋은 동료들 덕분이었다. “국내 웬만한 메이저 배급사 모두 '보통사람' 시나리오를 보고 좋아했어요. 그만큼 탄탄했죠. 또 우리 배우들이 너무 착했어요. 약속시간만큼은 꼭 지켜달라고 했는데 안 지킨 후배가 한 명도 없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이 잘 해온 덕분에 '보통사람'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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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성진은 냉혹한 안기부 실장 규남(장혁)으로부터 위험한 제안을 받고 양심과 부성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의도치 않게 어마어마한 일에 휘말리지만 사실 그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내, 다리가 불편한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 보통의 아버지다. 특히 아들이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애써 모르는 척 위로하는 신, 아내와 아들에게 주고남은 바나나 껍질을 이로 긁어먹는 신은 그의 부성애를 극대화시킨 명장면 중 하나. “사실 친아버지에게 힌트를 얻은 캐릭터에요. 우리 아버지도 권위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내가 연극한다고 했을 때도 바로 오케이하셨고, 건강하셨을 땐 같이 산보도 다니고 되게 친했어요. 제가 지금 버티고 있는 것도 아버지 영향이 크죠. 그런 걸 특정한 장면에 녹였다기보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모습이 그대로 제 안에 있는 거예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빨래하고 밥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저도 집안일이 익숙해요.”

주로 스릴러 장르에서 활약하면서 날카롭고 냉철한 이미지를 쌓아왔지만 손현주는 집에선 굉장히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권위는 동네 아저씨만도 못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평생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아들이 지금 중2라는 아주 험난한 시기를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 친구처럼 해주고 있죠. 아이가 커서 저보다 훨씬 따뜻한 가장이 됐으면 해요. 하지만 제 꼼꼼한 성격만큼은 안 닮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완벽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거죠. 사람이니까 실수도 할 수 있는 거고 어차피 각박한 세상인데 마음만큼은 여유로운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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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정한 손현주의 성격은 영화계에서도 유명하다. 덕분에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배우로 자주 꼽히곤 한다. 인터뷰 내내 처음 만난 기자들에게도 “피곤하지 않느냐”며 일과를 묻고 농을 던질 만큼 다정다감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휴대폰이었다. 손현주는 인터뷰 도중 휴대폰 속 신인배우들의 프로필을 보여주며 몇몇을 소개하기도 했다. 소속사도 없고 오디션 기회도 잡기 어려운 후배들을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계자들에게 직접 홍보한다는 것. 송중기, 보아, 유해진, 장윤정 등 분야·연령·성별을 초월한 그의 인맥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으면 다 가능해요. 나보다 어리거나 경력이 짧은 후배라 할지라도 무조건 배울게 있잖아요. 심지어 장윤정 씨의 음악도 듣다 보면 개인적으로 도움 받는 경우가 있거든요. 나이나 경력에서 생기는 벽을 내가 먼저 허물어야 사람 사이 길이 트이는 것 같아요.”

이 같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연기에서도 묻어났다. 그의 전작 ‘시그널’, ‘더 폰’, ‘악의 연대기’, ‘숨바꼭질’ 등만 놓고 보면 쉽게 연상하기 어렵지만 사실 손현주는 훨씬 이전부터 사람냄새 나는 캐릭터로 사랑받은 배우다. ‘장밋빛 인생’, ‘여우야 뭐하니’, ‘조강지처 클럽’, ‘이웃집 웬수’, ‘솔약국집 남자들’ 등에서 순박하고 서글서글한 생김새를 꼭 빼닮은 연기로 사랑받곤 했다. ‘생활연기의 대가’라고 언급하자 “순전히 작가님과 선배님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에 저를 써준 은인들 덕분이죠. 그런 의미에서 문영남 작가님, 김은경 작가님은 절대 못 잊어요. 그 분들이 91년도쯤 제가 정말 무지랭이일 때도 머슴 역 이런 걸로 저를 써주셨고, 그 때 조연·단역을 하면서 김인문 선배님, 김무생 선배님 같은 분들의 생활 연기를 많이 배웠죠. 지금 제가 연기하는 건 다 그 분들 덕분이에요.”

1시간 남짓 되는 인터뷰 내내 손현주의 말 끝에는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나올 수 없는 온기가 있었다.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 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말이 있어요. ‘보통사람’은 그렇게 진하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요. 같은 날 개봉하는 경쟁작들이 많지만 관객들이 부디 사람 이야기에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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