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시민'서 사회부 기자 출신 '주부 일진' 구재숙 역 맡아

"뺨 맞는 신, 내가 봐도 불쌍해… 눈물 차올라도 이 악물고 버텼죠"

"대중의 사랑과 진정성, 두 마리 토끼 잡고파… 먼저 문 두드려야죠"

'소시민'의 배우 황보라가 스포츠한국과 만났다. 사진=UL엔터테인먼트

[스포츠한국 이동건 기자] 어느덧 14년 차를 맞은 베테랑이지만 수더분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는 황보라의 모습은 처음 그를 봤을 때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수용할 듯 크디큰 눈망울, 호기심 넘치는 표정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에너지는 이제 그의 몸 깊숙이 박제된 듯했다.

데뷔 초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원조 러블리다. 왕뚜껑 CF부터 시트콤 '레인보우 로망스', 영화 '좋지 아니한가'까지 이쪽저쪽 통통 튀어 다니며 보는 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안겼다. 다만 대중의 기억 속 밝은 모습으로만 남아있는 황보라도 배우로서의 자각은 더욱더 뚜렷해지고 있다. 그래서 관객에게 새로운 얼굴을 선보이고 싶었고, 비루한 현실과 아픔 속에 몸을 적극 내던졌다. 영화 '소시민'을 통해서다.

'소시민'(감독 김병준)은 하루하루 성실히 사는 소시민의 초상 구재필(한성천)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며 겪게 되는 생애 가장 힘든 출근기를 담은 생활밀착 서민드라마.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소시민' 개봉을 앞둔 배우 황보라를 만났다. 구재필의 동생 구재숙 역을 맡은 그는 시나리오를 읽은 뒤 부산에 있던 감독에게 찾아가 출연 제안을 했을 정도로 작품에 열정을 보였다고. 하지만 촬영에 돌입한 뒤 이내 '아차'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오히려 신인배우가 했다면 무난하게 녹아들었을 역할이에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죠. 또 저희 영화는 거의 드라마 현장과 비슷했거든요. 제가 연기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실수가 크게 드러나는 상황이라 아차 싶더라고요."

얕잡아보면 안 되겠단 생각에 갖은 디테일에 온 신경을 쏟았다. 대쪽 같은 사회부 기자 출신 캐릭터를 위해 민낯 촬영은 주저 없이 임했고,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뺨을 맞으면서도 이를 꽉 물고 버텼다.

"뺨을 맞는 신은 너무 아팠어요. 눈물이 여기까지 차오르는데 '난 강인한 여자니까' 하고 참았죠. 스크린 속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제 모습을 보면서 '나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오빠(한성천)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핏대를 잔뜩 세우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기존 이미지에 대한 색안경을 벗기는 데 성공했다. 짙은 가족애로 극을 가득 채우며 롤을 톡톡히 해낸 황보라지만,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아우르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린단다.

"작품에 임하는 데 있어 연기 이전에 인간관계도 큰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통솔력이나 스태프·배우들을 챙기는 능력 같은 거요. 큰 그릇의 배우가 되려면 더욱 큰 사람이 돼야 하는데, 제가 자질이 되는지 계속해서 묻게 돼요. '소시민'을 촬영할 시기 전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연기적인 욕심만이 있었지,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못 됐죠. 이런 부딪힘 속에서 지금도 고민하고 있고,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과 일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느낀다는 황보라의 배우 인생도 서서히 2막을 맞이하고 있다. 태풍의 중심에 있을 땐 도리어 그 여파를 체감하지 못하듯, 그 역시 데뷔 초 자신에게 쏟아진 폭발적인 관심에 무감각한 편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 투성이다.

"나중에 보면 복일 거라고 선배들이 말씀해줬거든요. 그게 지금 느껴져요. 신인들이 이름을 알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어요. 그땐 철이 없을 때라 고마운 줄 모르고 그냥 '아싸, 땡 잡았다' 싶었죠. 연기력도 부족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절 포장해줬고요. 지금도 '왕뚜껑 소녀'라는 수식어는 고충보단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물론 '이병헌' 하면 '이병헌', '하정우'는 '하정우', 이름이 붙는 것처럼 온전히 제 이름으로 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어요."

제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십수 년을 거치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지치는 시기가 올 법한데 그는 늘 새로운 마음가짐이다. 이번에 저예산 독립영화를 택한 것도 새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그간 진정성 있는 캐릭터를 원해왔지만, 시청자분들은 기존의 발랄한 이미지를 원하신 것 같다"며 입을 열었다.

"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었기 때문에 드라마를 병행하며 돌파구를 어떻게 뚫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소시민'의 시나리오를 읽게 됐고, 자처해서 출연하게 됐죠. 앞으로도 제가 먼저 문을 두드리면서 길을 모색하고 싶어요. 이런 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또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제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진='소시민' 스틸컷

'소시민'을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황보라의 존재감이 가족드라마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2007년 신인여우상을 휩쓸었던 '좋지 아니한가'부터 시청률 20%에 육박하는 MBC '불어라 미풍아', 이번 '소시민'까지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연기할 때 그의 호흡은 숨처럼 편안하고, 너무나도 맛스럽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극장'처럼 가족애를 그리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어요. 요즘 꽂혀있는 프로그램은 EBS '리얼극장-행복'이에요.(웃음) 늘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보다 가족의 이야기를 더 좋아했죠. 저희 집안이 무남독녀인데, 사촌들과도 끈끈하게 잘 지내려 하고 핏줄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 마음이 확 동하고, 누구보다도 가족에게 끌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도 편하게 임했다. 그는 "어떤 호흡, 테크닉, 앙상블을 갖고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제 마음만 있으면 되는 연기였다"면서 "조미료 첨가 없이 원재료만으로 할 수 있는 연기였기 때문에 편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소시민'을 보고 나선 아빠가 가장 많이 떠올랐어요. 한마디 대사도 없는 아빠 역할을 하신 선배님을 보는데 마음이 짠하고 너무 슬프더라고요. 또 한편으론 부모님이 정년퇴직을 하시면 저도 배우이기 이전에 가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재필은 출근에 목숨 걸지만 전 촬영에 목숨을 걸죠. 같은 직장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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