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사진=미시간벤처캐피탈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 제작 ㈜지오엔터테인먼트)의 개봉일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여정은 일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거침 없는 열정을 인터뷰 내내 보여줬다.

‘계춘할망’은 과거를 숨긴 채 12년 만에 집에 돌아온 수상한 손녀 혜지(김고은)와 그런 손녀만을 오매불망 바라보는 평범한 할머니 계춘(윤여정)의 이야기를 다룬 가족 감동 영화다.

극중 윤여정은 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제주도 해녀 할머니로 열연했다. 고령의 윤여정에게 제주도 로케 촬영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해녀들의 수장인 상군 해녀를 맡은 만큼 수중 촬영 등 고생스러운 현장이 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죠.. 너무 고생스러울 것 같았죠. 이 나이에 그렇게 과로하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누군가가 열심히 순수하게 쓴 기교 안 부린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내가 잘 어울릴까 의문이었어요. 난 도회적인 이미지인데 왜 날 섭외하냐 했더니, ‘선생님의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멸되셨습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재미있는 청년이구나 싶어서 한 번 만나봤죠. 그때 이미 반쯤 발을 담근 거죠.(웃음)”

사실 윤여정이 기존의 도회적 이미지를 벗고 따뜻한 시골 할머니로 연기 변신에 나설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지는 그의 연기도전을 막을 수 없었다.

윤여정 사진=미시간벤처캐피탈
“이미지는 대중들이 만드는 거죠. 사람에겐 여러 가지 면이 있어요. 마음 약한 부분도 있고 그런 거죠. 지금까지 매몰차 보였다면 그건 내 잘못은 아닐지라도 내게 그런 면이 있는 거죠. 그런 걸 걱정하지는 않아요.”

평소 윤여정은 경제적 관념이 중요하다고 여러 방송을 통해 언급한 바 있다. 배우라는 소위 예술인으로서 금전적인 부분은 대부분 쉬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이마저도 거침 없었다. 털털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그는 ‘금기’로 여겨지는 영역에 대해 털어놨다.

“돈은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거죠. 누가 돈을 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돈을 안 잃었으면 하는 게 당연한 거죠. 대박이나 흥행은 바라지도 않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 이야기를 좋아해서 투자했으니까 빛을 봤으면 하는 거뿐이에요. 내 돈이 중요한 만큼 남의 돈도 중요한 거죠. 흉도 아닌데 왜 이걸 금기로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난 배우를 직업으로 해요. 그럼 난 정당한 보수를 받고 일하고, 정당한 보수로 날 쓴 사람이 성공하면 좋은 일 아니겠어요? 내가 내 일을 하는데 두려운 게 뭐가 있겠어요?”

이렇게 솔직 당당하고, 털털한 매력을 보여주는 그지만, 영화 ‘계춘할망’에서는 항상 아련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눈빛은 설정하지 못한다는 그는 영화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현장이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었다는 등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이내 곧 진지한 연기자로 돌아와 숨겨왔던 진심을 고백했다.

“내게도 어릴 때 증조할머니가 있었어요. 손녀도 아니고 손자의 딸이니까 얼마나 예뻐하셨겠어요? 근데 나는 불결하다고 생각해서 너무 싫어했어요. 근데 나이가 오십을 넘으니까 증조할머니 생각이 문득 나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가장 날 사랑했던 것은 증조할머니셨을 텐데. 아직도 증조할머니한테 죄송해요. 그래서 이 영화는 증조할머니께 바쳐보자고 생각했어요. 이게 내 스스로 영화 출연을 설득한 이유였던 것 같아요”

윤여정 사진=미시간벤처캐피탈
‘계춘할망’에서 윤여정은 김고은과 처음 호흡을 맞춘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지고 애틋한 호흡을 보여줬다. 그는 어떻게 김고은을 만났을까?

“영화계는 평등해요.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죠. 다만 감독이 내게 눈여겨본 배우가 있냐고 하길래, 천우희와 김고은을 눈여겨봤다고 말했어요. 근데 감독이 천우희는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내겐 뭐 둘 다 어려 보이지만요. (웃음) 그래서 김고은이 좋다고 했을 따름이에요”

윤여정이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김고은을 향한 사랑은 그의 표현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덤덤하게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는 손녀를 끔찍이 여기는 할머니에 몰입해 그가 표현하려 했던 사랑을 말했다.

“남녀간의 사랑은 주고 받는 게 있어요. 근데 이건 무조건적이고, 짐승 같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 할머니 역할이 좋았어요. 진심으로 손녀를 껴안을 수 있었고, 손녀의 인생을 너무 안됐어 하면서 품에 안을 수 있는 게 좋았어요. 하나님의 사랑 같이 위대해 보였어요. 우직하고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그냥 몸으로 어떤 인생이기에 내게 왔을까 느끼는 거죠. 아마도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택했는지도 몰라요.”

평소 패셔니스타, ‘걸크러시’ 등 뭇 여성들의 워너비로 꼽히는 윤여정, 항상 젊게만 사는 그이기에, 열정적인 사랑은 어쩌면 당연히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계춘할망’ 속 세상 가장 따스한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난 남녀간의 사랑을 초월했어요. 남녀간의 사랑은 장님이 되는 거잖아요? 난 장님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인생은 때가 있어요. 누구는 영원히 사랑을 해야 된다고 하지만 난 다른 종류의 사랑을 하고 싶어요. 세상에 가장 재미 없는 게 남녀간의 사랑인 거 같아요. 남녀간의 사랑은 교통사고 같아요. 난 이제 손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입양하는 인류애적인 사랑 같은 것들을 하고 싶어요.”

어느새 일흔이라는 나이가 된 윤여정, 모두가 두려워하는 세월 앞에서도 그는 당당했다. 윗사람이라는 수식어도 싫다는 윤여정. 그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가지고 배우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살고,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게 삶이에요. 그게 삶의 질서인데 이야기를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당장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그래서 난 계획은 잘 안 세워요.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단 내가 하겠다고 했으면 하는 거죠. 젊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 좋은 건, 일을 들어왔을 때 순서는 지킬 수 있다는 거에요.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하되, 좋아하는 감독, 작가랑 일 할 수 있다면 내게 더 이상의 사치는 없죠. 사람들이 나를 깔 볼까 봐 나이를 강조하는데, 난 아무것도 거칠게 없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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