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제품들이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친근한 상호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제품들을 접하며 살아간다. 한국인의 생활 속 깊숙이 자리잡은 대표 제품군과 그 제조업체의 성장 이면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스포츠한국 조민욱 기자]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될 때, 간편하게 편의점이나 약국에서 소화제를 찾는다. 많은 소화제들이 판매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이 가장 많이 즐겨찾는 소화제는 동화약품 ‘활명수’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올라오는 탄산가스는 불편한 속을 뻥 뚫는 시원한 느낌을 선사한다. 올해로 출시 123주년을 맞은 '국민 소화제' 활명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 국민의 ‘생명을 살리는 물’ 활명수

활명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자 양약인 ‘활명수’에서 비롯한다. 활명수의 탄생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맵고 짠 음식을 선호하는 입맛과 빨리 많이 먹는 식습관으로 인해 소화불량이 흔했다. 급체로 사망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한 약이 없었던 탓에 민간요법 또는 달여서 먹는 탕약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은 궁에서 쓰던 11가지 생약 성분에 서양 의학을 결합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는 혼합처방을 고안했다. 이것이 활명수의 시초다. 소화불량을 해결해주고 복용도 간편한 활명수는 이름처럼 ‘생명을 살리는 물’로 알려지며 전국으로 퍼졌다. 활명수의 개발은 우리나라 제약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7년 9월 25일, 민병호의 아들인 민강 선생은 서울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설립하고 활명수 대중화에 나섰다. ‘동화’는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활명수가 인기를 끌면서 경쟁사들이 잇달아 유사제품을 출시하자 동화약품은 1910년 ‘부채표’ 및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부채표 모양의 로고가 찍힌 활명수가 ‘원조’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1931년에는 동화약방을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법인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약회사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까스활명수’는 1966년에 탄생했다. 앞서 경쟁사에서 활명수 유사품에 탄산가스를 주입한 제품을 선보이며 활명수 판매량에 근접해오자 출시 70여년 만에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활명수에 탄산가스를 주입하면서 탄생한 까스활명수는 리뉴얼한 지 2년 후 경쟁사 제품을 누르고 소화제 시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까스활명수-큐’를 발매해 시장 입지를 굳건히 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인의 식습관이 변화하면서 소화제 시장이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동화약품은 배우 이윤지, 신세경 등 젊은 모델을 앞세워 신세대층을 공략하는 마케팅으로 위기를 타개했다. 이어 2002년 오약, 지실, 감초 등을 추가해 소화력을 강화한 프리미엄 브랜드 ‘활명수 골드’를 내놨다. 이후에는 여성을 위한 ‘미인 활명수’, 어린 아이를 위한 ‘꼬마 활명수’, 편의점용 의약외품 ‘까스활’을 선보이는 등 다양한 소비층을 겨냥해 활명수 라인업을 확대했다. 현재 활명수의 연간 생산량은 약 1억 병, 누적 판매량은 85억 병에 달한다. 한 줄로 세우면 지구 25바퀴를 돌 수 있는 양이다. 지난해 매출 600억원을 넘긴 활명수는 액체소화제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오랜 주당들에게 활명수를 얘기하면 ‘활명수 칵테일’을 떠올리기도 한다. 1960년대 당시 유명 소주회사 영업팀이 판촉활동 차원에서 술집을 돌아다니며 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시범을 보이곤 했다. 소주의 쓴 맛을 없애주고, 활명수의 색이 소주와 섞여 노란 빛깔을 내 마치 양주를 마시는 느낌을 준 것이다. 활명수 칵테일이라는 이름의 제조방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당시 주당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 연통부 기념비
◆ 독립운동 지원한 백년 기업 ‘동화약품’

동화약품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업이다. 1920년대 활명수 한 병의 값은 50전으로, 당시 설렁탕 두 그릇 가격이었다. 비싼 몸값을 자랑했던 활명수의 판매액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됐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고가의 활명수를 지참했다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또한 동화약품 초대 사장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민강 선생은 3·1운동 직후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사이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했다. 이 일로 당시 동화약품은 문을 닫을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현재 동화약품 옛 본사 앞에는 ‘서울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에 힘을 쏟은 민강 선생은 일제의 압력에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건강악화로 1931년 48세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민강 선생의 사망 이후에도 동화약품의 애국정신은 후대 경영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1937년 동화약품을 인수하면서 5대 사장으로 이름을 올린 윤창식 선생은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산직장려계', 빈민 구제 활동을 하는 '보린회', 민족운동을 표방한 '신간회' 등을 지원했다. 1973년 7대 사장으로 취임한 윤광열 명예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재학 시절, 일제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뒤 중국 상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 일업백년 기업 동화약품은 활명수로 국민의 건강을 지킨 것은 물론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지킨 우리 역사 속의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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