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이리의 얼굴·뱀의 혀'로 관객 압도
'관상' 역적상 수양대군역 20년 연기내공 만개 찬사

20년. 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이다. 하지만 세월의 더께가 그의 외모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속은 여물었다. 영화 '관상'(감독 한재림ㆍ제작 주피터필름)을 통해 배우 이정재는 만개했다.

'관상'에서 역적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중 그는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그의 관상과 잔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수양대군은 이리의 얼굴, 역적의 상을 가진 인물이다. 20년째 '꽃미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이 남자에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하지만 기우였다. "역모상으로 보이려 특별히 노력하진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의 비릿한 웃음과 서늘한 눈빛은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을 압도할 법하다.

이정재가 '관상'을 통해 거둔 수확은 송강호와 백윤식이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맞대결에서 거둔 터라 더욱 값지다. 극중 수양대군은 주로 김내경(송강호) 김종서(백윤식)와 마찰음을 낸다. 연기 9단쯤 되는 이들과 한 프레임에서 자웅을 겨루며 이정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그는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고의 효과를 냈다. 왕족인 수양대군의 동작은 크지 않다. 주로 앉아서 이야기하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말 한 마디에 누군가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금이 저리다. 이 힘든 연기를 이정재는 이리의 얼굴과 뱀의 혀로 소화해냈다.

수양대군은 '관상' 속에 풀어 놓은 메기다. 메기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미꾸라지들은 부리나케 움직이고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의 활동성이 높아진다.

연출을 맡은 한재림 감독은 영화 '하녀' 속 이정재에게서 수양대군의 모습을 봤다. 비열한 품위로 젠 체하던 현대의 재벌이 왕위 찬탈을 노리는 과거의 왕족으로 시대를 거스르며 업그레이드됐다.

한재림 감독은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당시 수양대군의 실제 나이가 대략 37살 정도라고 하더라. 30대 후반의 나이에, 야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야망이 결코 천박하지 않고 태생적인 품위가 묻어 나오는 인물, 새로운 수양대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하녀'에서 봤던 주인 남자 훈을 연기한 이정재를 떠올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단언컨대 한재림 감독은 최고의 선택을 했다.

이정재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을 거친 후에야 다시 연기 인생을 시작하는 듯하다. 요즘 그의 필모그래피는 탄탄하고 든든하다. '도둑들'의 뽀빠이는 흠잡을 데 없었고 '신세계'의 이자성은 빼어났다. 그리고 '관상'의 수양대군은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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