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영화 '키친' 출연… "한눈에 반하는 사랑은 NO"

"머리가 길면 어떤 역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화분의 작은 잎 한 줄기가 손가락 마디만큼 자라는 모습에도 미소가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성장하는 배우를 보는 즐거움에 비할 수 있을까. 배우 주지훈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나무와 같다.

최근 그의 행보를 보면 2006년 MBC 에서의 고독한 황태자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데다 모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도리어 손해를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영화 (감독 홍지영ㆍ제작 수필름ㆍ5일 개봉)에서 두레 역을 연기한 그는 부쩍 자라 있었다. 지난해 영화 (감독 민규동ㆍ제작 영화사 집ㆍ이하 앤티크)에 출연했을 때와 또 달랐다. 개봉 다음날인 6일부터는 뮤지컬 에 도전한다.

주지훈은 에서 자신을 동생처럼 챙겨주는 상인(김태우)의 아내 모래(신민아)를 사랑하게 된 두레를 밉지 않게 소화해냈다. 아니, 사실은 두레가 주지훈이고 주지훈이 두레인양, 물 흐르듯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사랑 앞에 저돌적인 두레에 대해 "순진하지는 않지만 순수한" 인물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스물여덟 주지훈은 서른 다섯살 이상의 성숙한 내면을 갖춘 배우였다. 꾸밈없는 말 속에서 사물과 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스며 나왔다. 그러나 선입견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는 10대와 같은 파릇함도 비쳤다.

눈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이유도 '모델 출신으로서의 멋'이 아닌, '준비된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짧은 헤어스타일의 배역을 하게 되면 자르면 되니까요. 긴 머리가 필요하면 유지하고요"라며 웃었다.

이후의 유명세에 대해 "기쁨도 너무 큰 게 한꺼번에 오면 고통일 수 있어요"라는 말로 눙쳤고, 그 고통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어 KBS 2TV 을 택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강동구 천호동 출신으로 여전히 천호동에 살고 있는 그는 혼자서 KTX를 타고 여행을 다닌다. 마흔 살에도 "마음이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상록수다.

# 두레=불순물 없는 결정체

주지훈은 우연찮게도 부부 사이인 민규동 감독과 홍지영 감독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했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만 해도 두 감독의 인연을 미처 몰랐고, 두 작품의 시기가 겹쳐 '당시 마음 상태와 비슷했던' 를 먼저 택했다.

의 촬영 일정이 늦어지면서 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주지훈은 프랑스에서 요리를 공부한 입양아이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두레를 연기할 때 일부러 힘을 주는 설정은 지양했다.

"영화의 주제는 '사람의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사랑이라는 부분에서 이해가 갔죠. 두레는 순진하지는 않지만 순수한 인물이에요. 불순물이 없는, 밀도 높은 결정체라고나 할까요.

남녀 간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에요. 모래가 두레와 상인을 동시에 사랑하듯, 두레도 상인과 모래를, 상인도 모래와 두레를 사랑하죠. 결국 어린아이와 같았던 두레가 처음 맛보는 세상의 아픔이랄까요. 나중에 '내가 한 행동이 상처를 줄 수 있구나' 깨닫는 것이죠."

주지훈은 모래가 공기와 같은 안온함을 지닌 남편 상인과, 불꽃 같은 전율을 전하는 두레 사이에 고민하듯 관객이 사랑에 대한 물음표를 갖게 되는 데 기쁨을 느낀다. 주지훈이라면 어떤 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느낄까?

"편안한 여자친구가 있는 가운데 설레는 상대가 생긴다면? 여자친구와 문제가 없다면 새로운 상대에게 끌리지 않겠죠. 그 설렘도 결국은 편안함이 될 테니까요.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은 믿지 않아요. 수학적으로 따진다면 제가 동갑내기를 만난다면 28년간 다른 삶을 살았기에, 28년은 알아가야 서로를 알 수 있죠. 운명적인 사랑은 믿어요. 예컨데 제가 모델 활동을 할 때 하필이면 어떤 디자이너를 좋아해서 그 쇼에서 만났다면, 그 만남은 그동안의 수많은 일과 제 생각이 집약되어서 생기는 인연이니까요."

# 모델 그리고 배우 주지훈=나를 표현하다

주지훈은 모델로 활동하다 배우로 데뷔했다. 모델로 활동할 때에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의 컬렉션에 서는 정도였다. 주지훈은 무대의 매력이 가장 크다고 했다.

"집중력이라고 할까요. 사고 나기 전의 초감각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 발을 내디딜 때의 시간은 매우 짧지만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고 저에게는 매우 긴 시간처럼 느끼지죠. 첫 쇼는 아예 기억이 안 나요. 하얀 기억 뿐이에요."

그렇다면 주지훈이 생각하는 연기란 어떤 느낌일까. 주지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아성찰'이라는 단어를 내놨다. 바쁜 생활에서 자기 자신과 만나기 힘들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란다. 간접 경험이라도 자신 속의 것을 끄집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지훈은 최근 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일본 방문 당시 나고야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과 그림, 영화의 구도 공통점을 찾는데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원근법을 다룬 유명 화가의 작품을 봤는데 첫 눈에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였어요. 그냥 웃었죠. 광각렌즈로 사진을 찍어 노트북에서 보고 있는데 문득 깨달았어요. 저는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그런 시각을 알 수 있었지만, 육안으로 발견하고 그림에 옮긴 것은 대단한 발견이었구나. 궁금함이 막 생기더라고요."

# 자연인 주지훈=선입견 없는 삶 원하다

주지훈은 평소 시간이 나면 한강에서 조깅을 하고, 한강변에서 맥주를 마시곤 한다. 혼자 기차를 타고 지방 여행도 다닌다. 얼굴을 가리지 않지만 의외로 알아보는 이가 적다.

"예를 들어 동대문에 쇼핑을 나간다고 해요. 대부분 사람들은 (옆에 누가 있는 듯 고개를 돌리며)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앞을 무표정하게 보며) 생각에 잠겨 걷죠. 주변에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그런데 눈에 띈다는 건 분위기가 뭔가 다르다는 것이죠. 저는, 아마, 분위기가 특별하지 않으니까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아요. 배우는 제가 좋아하는 직업일 뿐이지요. 저는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거든요."

주지훈이 유명세를 탄 뒤에도 거리를 걷는 이유는 역설적으로는 많은 경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레스토랑 서빙부터 갖은 아르바이트를 해 봤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연기하는 게 외계인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데…사람을 연기하잖아요. 너무 숨어서 살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도 뭔가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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