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유괴당한 부모의 심정으로 연기"… 슬픈 이야기지만 가족사랑 녹아있어

이런 우울한 분위기의 인터뷰는 처음이다.

묻는 기자도 조심스럽고, 대답하는 배우들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워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무엇에 눌린 듯 답답함이 가슴 한 곳을 짓누른다. 배우들을 힘겹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 (감독 박진표ㆍ제작 영화사 집)는 두 주인공 설경구와 김남주를 여전히 매어두고 있었다. 영화는 여전히 범인이 잡히지 않은 지난 1991년 고(故) 이형호 군의 유괴 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인터뷰 내내 반인륜적인 유괴 사건을 직접 연기하려는 배우의 고충이 그대로 느껴진다. 영화 속 캐릭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아니 빠져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는 두 주인공을 서울 삼청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났다.


# 더했다. 그리고 버렸다

설경구만큼 이미지가 고착화된 배우도 드물다. 설경구는 지금까지 출연해온 영화 등에서 사회 기득권과 거리가 먼 캐릭터로 팬들을 만났다.

그가 맡아온 캐릭터는 항상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영화 속 캐릭터는 매번 사회에 대한 분노와 응어리를 거친 말투와 몸짓으로 표출했다. 그가 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괴범 역이 아니겠느냐고 예상한 것도 이런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창백한 지식인’의 이미지다. 잘 나가는 지상파 뉴스의 앵커라니 직업만으로 따진다면 그의 전작 캐릭터와 180도 다른 셈이다.

그가 맡은 한경배는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유괴당하면서 여느 아비와 마찬가지로 삶의 희망을 점차 잃어간다.

지적인 이미지를 더하기 위해 외적인 변화가 그에게 필요했다. 설경구는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지적 이미지의 덧붙임’이라고 표현했다.

설경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달 넘게 피부과에 다녔다. 점도 빼고 피부 관리를 받았다. 무엇보다 이미지를 한꺼번에 바꾼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김남주는 이와는 반대다. 자신이 그간 광고와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이미지를 벗어내야 했다. 지적이고 도도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덜어냈다. 덜어낸 그 자리에는 애절한 모정을 채워넣었다.

달라진 이미지를 위해 평소 CF를 통해 볼 수 없었던 모습도 드러냈다.

김남주는 이번 작품에서 남자 배우보다 메이크업 시간이 적게 들 정도로 별다른 치장 없이 연기에 나섰다. 맨 얼굴로 절규하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더욱 다가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김남주는 “촬영을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여자가 아닌 엄마가 되고 싶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여배우로서 예쁜 모습을 챙길 여력도 없었다. CF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헐렁한 옷을 입고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난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표현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 지난 여름 스스로 학대했다

박진표 감독은 를 알리는 자리에 나설 때마다 두 배우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 놓았다. 설경구와 김남주는 박 감독이 무어라 주문도 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카메라 앞에 섰다.

영화의 모델인 된 고 이형호 군의 부모가 된다는 심정으로 자신을 학대에 가깝게 몰아 부쳤다. 박 감독이 내내 미안함을 가진 이유도 이들 배우의 치열함 때문이다.

실제로 설경구와 김남주는 아이를 유괴당한 부모가 밥을 제대로 먹을지, 잠을 제대로 잘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일부러 잠을 자지 않고 끼니를 거르면서 촬영에 나선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한 아이의 엄마인 김남주의 마음고생은 더욱 심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와 촬영장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심정을 동시에 겪는 바람에 내내 속앓이를 했다.

하지만 설경구와 김남주는 영화 캐릭터를 표현하느라 마음고생을 한 게 실제 사건의 부모의 심정과 비교될 수도 없다고 말을 아꼈다.

설경구는 “촬영을 없는 날이면 힘들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감정을 혹여 놓치지 않을까 불안해서 촬영장을 일부러 찾은 적도 많았다. 2006년 6월 촬영을 시작하고 한 달 만에 21회차를 내달렸는데 오히려 그때가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남주는 “지난 여름 미친 듯 뛰어 다녔다. 유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많은 이들이 공감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있었다. 영화를 보면 함께 느끼고 함께 분노할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를 통해 형호의 부모님, 그리고 감독님 등 소수만이 기억했던 ‘그놈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이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절망보다 희망이 아름답다

영화는 주도면밀한 유괴범이 한 아이를 잃은 부모를 어떻게 파괴시키고 마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부모와 함께 애타는 심정으로 아이를 찾아 헤맨다.

결국 아이는 44일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흘릴 눈물마저 말라버린 관객은 또 다시 분노에 휩싸인다.

설경구와 김남주는 영화가 절망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설경구는 “범인이 잡히는 이야기 구조라면 훨씬 빠르게 진행돼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전이 없다.

아이가 죽고 말지만 마지막 희망이 남아있다. ‘그놈’을 잡을 수 있다는, 잡아야 한다는 희망을 주는 영화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남주는 여기에 가족애를 덧붙였다.

김남주는 “영화를 보고 난 주위 사람들이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다고 말한다. 많은 분들이 영화 속 ‘낳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는 대사가 절절히 다가왔다고 말하더라. 슬프고 절박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가족의 사랑이 녹아있다”고 말했다.

설경구와 김남주는 영화 촬영을 마치고 그 흔한 ‘쫑파티’조차 갖기 않았다. ‘그놈 목소리’는 현실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진행형 영화이기 때문이다.

개봉과 함께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고 끝이 아니다. 제작진은 이 영화를 통해 실제 사건을 일으킨 ‘그놈’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있다.

두 배우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작진이 바라는 ‘쫑파티’의 날이 올 수 있을까? 가 사회에 어떤 메아리를 남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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