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형사반장, 영화 '한반도' · 연극 '진술' 출연

교회 연극반 활동으로 연기생활 시작한 연극계 최고의 명배우 강신일.

그는 박광수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계에 진출하고, 강우석 감독을 만나 '공공의 적', '실미도' 등의 흥행작에 출연하게 된다. 최근 영화 '한반도'와 하일지 원작의 연극 '진술'을 통해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는 그의 연기 인생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강신일 (배우)

- 지금까지 몇 편의 연극을 하셨나요?

세어보진 않았지만 40~50편정도 한 것 같네요.

- 지금도 무대에 설 때 여전히 떨리나요?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회를 거듭할수록 더 긴장되고, 떨리고, 관객이 두렵기도 합니다.

-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징크스가 있나요?

전 특별히 없어요. 그저 무대 뒤에서 객석이 암전되기까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합니다. 오늘도 무사히..라고.

- '공공의 적'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후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던데, 무슨 뜻인가요?

연극을 할 땐 거리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어요. 그땐 굉장히 감격스러웠죠. 그런데 '공공의 적' 영화 한 편을 하고 나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절 알아보더라고요. 그런 데서 오는 허탈감이 있었죠. 영화의 힘에 놀라기도 했고, 십 수 년 연극을 해온 세월에 대한 허탈감도 있었어요.

- 경기도 의정부가 고향이라고요?

태어나서 자란 곳은 의정부인데요. 저에게 고향이란 어머니의 품 같고, 언젠간 돌아가야 할 나의 뿌리가 있는 곳을 의미해요. 그래서 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셨던 곳인 황해도 연백을 고향이라고 얘기하죠.

- 고등학교 때 연극을 시작하셨다고요?

고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됐는데요. 그 교회에 연극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문학의 밤 행사를 연출하시면서 저에게 시 낭독을 시키셨어요. 그런데 제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고등부 졸업발표회 때 저에게 연극 주인공을 맡기시더라고요. 그게 저에겐 첫 연극 경험이었어요. 그 후로 청년부를 다니면서 그 선생님과 마음에 맞는 청년 몇이 모여서 작은 연극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죠.

- 1980년에 극단 '증언'을 만드셨죠?

그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사람들끼리 작은 연극을 만들어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정식으로 극단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어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일반 극장에서 정기공연을 갖고, 순회공연은 연중무휴로 해보자 싶어서 극단을 만들었죠. 당시 극단을 만들 때 세 가지 목표를 정했어요. 첫째, 연극을 통해 선교를 하자. 둘째, 연극을 통해 다양한 문화의 디딤돌 역할을 하자. 셋째, 선교는 아니더라도 연극을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하자. 이런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극단을 만들었죠.

- 그 후 연우무대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그 선생님이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었는데요. 학교에서 함께 연극 활동을 하던 후배들이 김민기 씨라든가 지금 연극원 교수를 하고 계시는 이상우 씨, 김광림 씨, 김석만 씨 등이었어요. 그분들이 당시 연우무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다가 연극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선생님께 문의를 했더니 연우무대를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 당시 연우무대에서 같이 공연했던 배우는?

86년에 연우무대에 들어가자마자 '칠수와 만수'를 했는데요. 칠수 역은 문성근 씨가 했고, 만수 역은 제가 했습니다.

- 1990년에 김민기 씨와 함께 '학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당시만 해도 대학로에 번듯한 극장이 없었어요. 기존 건물의 지하를 개조한 극장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그런 극장도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김민기 씨와 연우무대에서 일하던 몇몇이 함께 건물 설계부터 극장다운 극장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순수하게 민간 차원에서 투자해서 연극 뿐 아니라 음악, 무용 등 기타 장르의 공연 예술가들이 공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자고 뜻을 모아서 작업을 했죠. 그래서 저는 배우 활동을 접고 5년 동안 스태프로 일했어요. 개인적으로 그 극장을 만드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후회하진 않았는데요. 간혹 무대에 서있는 배우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어두운 조명실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면서 외롭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나도 곧 돌아가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5년을 보냈죠. 무대에 서는 게 두렵고 외롭기도 하지만 무대에 서있을 때가 행복하니까요.

- 5년 후 첫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덕혜옹주'라는 작품이었어요. 당시 육체적으로 안 좋을 때여서 당분간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연 제의가 왔어요. 그래서 거절을 하고 다른 배우를 소개했어요. 근데 그 배우가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공연에서 빠져버렸어요. 공연이 코앞에 닥쳐온 상황이라 공연 연출자가 '네가 소개했으니 네가 책임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하게 됐죠. 그때 윤석화 씨, 이주실 씨와 함께 공연했어요.

- 강신일 씨에게 연극은 무엇인가요?

제 삶인 것 같아요. 저는 살면서 특별하게 다른 큰 의미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학창 시절에도 학교생활보다는 교회 연극 쪽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에 취직한다거나 남과 경쟁하는 일은 못하겠더라고요. 자신도 없었고, 저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가치관을 공유하거나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나도 행복하고, 내 주변에도 그런 행복을 전이시킬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연극을 선택하게 됐죠.

-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나요?

물론 힘들지만, 힘들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어차피 연극은 배고픈 일이란 걸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불편함은 전혀 없었어요. 남들처럼 옷을 잘 차려입거나 먹을 걸 제대로 먹진 못했지만요. 공연 끝나면 저녁에 리어카를 끌고 나가서 군고구마 장사도 했어요. 어느 날 공연 끝나고 나갔더니 리어카가 없어져버린 적도 있었고요. 근데 그런 걸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조차 저에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근데 극단 선배가 저의 사는 모습을 보시더니 '신일이는 저러다가 평생 결혼을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시 저는 와룡산 자연보호 팻말 바로 밑에 옥탑방 비슷한 곳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어요. 전세보증금이 150만원에 월세가 2만원이었고, 옷은 선배들이 작아서 못 입는 옷을 가져다 입었어요. 저는 그런 게 전혀 불편하지 않았지만 선배는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안 되겠다, 생활력 있는 여자를 소개해야겠다' 싶었나봐요. 그래서 89년 크리스마스 때 강제로 미팅을 해서 아내와 만나게 됐어요.

- 연극에 대해 회의가 든 적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우리 막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연극 외에는 저에게 관심사가 없었어요. 인생을 사는 데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하는 일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그런 걸 암암리에 요구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 아이들에겐 미안하죠. 장난감이란 걸 한 번도 사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살다가 셋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야 할 도리는 해야겠다, 아이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은 내가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지금보다는 좀 더 돈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그런 부분이 영화계로의 진출에 작용을 했나요?

그렇죠.

- 처음 영화 일을 할 때 적응은 잘 하셨나요?

연극은 준비하고 공연하는 몇 달 내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몸으로 같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공동의 작업이예요. 땀 냄새가 진하게 나는 작업이죠. 근데 영화는 감독을 중심으로 일이 전문화되어 나눠져 있잖아요. 배우는 필요할 때만 가서 연기를 해야 하니까 몸이 근질거리긴 했죠.

- '공공의 적', '실미도'에 이어 '한반도'까지 강우석 감독의 작품에 계속 출연하셨는데요. 강우석 감독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날 보러 와요'라는 연극에서 제가 반장 역할을 했는데 강우석 감독 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강우석 감독이 연극을 녹화한 비디오를 구해서 봤나봐요.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게 아니라 제가 나온 장면만 보고서 저를 찍었대요. 그전까지는 개인적인 안면이 없었어요.

- 가장 인상적인 감독이나 연출가는?

박광수 감독과 강우석 감독이예요. 박광수 감독은 저희 연우무대와도 관계가 있는 분이죠. 박광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이재수의 난'은 원작소설이 있어요. 현기영 선생의 '변방에 우짖는 새'인데, 그 작품을 87년에 저희 극단에서 공연했었어요. 그때 제가 이재수 역할을 했고요. 당시 박광수 감독은 연우무대와 자주 왕래가 있었는데 자기가 영화를 만들 때 연우무대 배우들이 같이 참여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화에 참여하게 됐죠. 그리고 작품이 갖고 있는 사회성이나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 영화가 잘 안됐지만 박광수 감독은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강우석 감독은 제가 영화를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예요. 강우석 감독은 또 다른 천재성이 있어요. 현장을 굉장히 활기차게 만드는 능력도 있고, 화를 내지 않으면서도 현장을 장악하는 힘이 대단해요. 그리고 매사에 망설임이란 게 없더라고요. 자기 의지대로 거침없이 촬영을 진행하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촬영하는 내내 유쾌했어요. 그리고 보통 연극만 오래 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면 다소 경직되거나 연극적인 어투를 지적받는데요. 첫 테이크를 끝내고 강우석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가 굉장히 경쾌하게 들렸어요. 그러면서 영화가 이런 재미도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점차 다른 스태프들도 눈여겨보게 됐죠. 감독이 슛 했을 때의 정적에서 오는 신비감과 짜릿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 연극 '진술'은 어떤 작품인가요?

5년 전에도 이 공연을 했고,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예요. 한 사람의 모노로그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대학교수가 처남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경찰에 끌려와서 심문을 당하는 것에 대한 진술을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하일지 씨의 원작소설을 읽으면서 일단 혼자 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배우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거든요. 특히 남성 모노는 별로 없고요. 그리고 어법이나 말투가 재밌었어요. 문어체라 관객들에겐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이 모노로그의 장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전엔 하일지 씨가 매일 공연장을 찾아와서 공연이 끝나면 저를 집까지 차로 바래다줬어요. 왜냐면 한 사람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내용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고 진이 빠진다는 걸 작가는 알았던 거죠. 공연 끝나면 거의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저를 집까지 바래다주셨죠. 공연하는 동안 '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 하겠다고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어요.

- 슬럼프를 느낀 적은 없나요?

가끔 내가 뭘 하고 있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영화나 연극 현장에서 아주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에 매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움을 많이 느껴요. 내가 잠깐 오만했구나 반성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제 인생에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을 돌아보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바람입니다. 꿈이 있다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가장 건강하게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입니다.

▶ 진행 : 공지영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월~토 오후 4시 5분~5시)
▶ 한글주소 : 특별한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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