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고교야구대회인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김해고 선수단이 시상식이 끝난 뒤 크게 환호하고 있다.
1993년 여름, 한양대 2학년이던 박찬호는 대학야구대회에서 최고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던졌다. 대학 야구 투수로서는 사상 가장 빠른 볼이어서 다음날 아침 모 스포츠신문의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고 이 소식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도 금방 전해졌다. 여러 팀이 계약 의사를 타진했지만 LA 교포 60만명의 ‘비즈니스 사이즈’를 계산한 LA 다저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박찬호는 마침내 대학 중퇴에다 군 미필의 신분으로 1994년 메이저리그에 전격 데뷔한다. 그해 4월 9일 메이저리그에 직행, 2번 등판에서 4이닝 6실점(6K)한 박찬호는 무한한 가능성만 보여준채 이후 2년간 더블A와 트리플A에서 눈물젖은 빵을 먹으며 혹독한 담금질을 한다.

박찬호는 쓸데없이 왼다리가 번쩍 올라가는 하이 키킹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투구폼을 2년간 반듯하게 다듬어 1997시즌 메이저리그 복귀식을 멋지게 치렀고 마침내 아시아 선수로는 최다인 통산 124승을 장식하고 2010년 은퇴한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약 충남 공주고 출신인 박찬호가 대학 졸업후 연고팀인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박찬호는 실제로 1991년 공주고 3년때 계약금 5000만원을 받고 한화에 들어갈 뻔 했으므로 이 가설은 신빙성을 얻는다.

박찬호는 시속 160km를 던지는 무시무시한 강속구 투수로 입단 초기 엄청난 각광을 받았겠지만 컨트롤이 엉망이라 한,두달만에 2군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2군에서도 볼만 빨랐지 투수의 기본인 스트라이크를 못 던진다는 코치들의 온갖 핀잔을 들으며 2년도 안돼 유니폼을 벗었을 것이다.

박찬호라는 이름에 올해 고교야구 최고의 좌완이라는 ‘김진욱(강릉고)’을 대입해보자. 김진욱은 최고 시속 145km를 던져 초고교급이라 불리는 만큼 내년 신인 드래프트 2차 1번 지명권을 가진 지난해 10위 롯데 유니폼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원래는 삼성에 1차 지명돼야 하지만 전학 규정으로 2차 지명으로 밀림).

롯데의 이제까지 신인 기용 관행을 보면 김진욱은 내년 개막초부터 1군에서 뛰게 된다. 그렇지만 김진욱은 1군 강타자들의 파워있고 정교한 공격을 견디지 못해 1,2군을 전전할 공산이 크다.

이에 비견할 대표적인 선수가 롯데 2년차 서준원(20)이다. 경남고 출신인 서준원은 사이드암스로치고는 매우 빠른 시속 150km를 던져 2018년말 연고팀인 롯데에 1차 지명됐다. 하지만 서준원의 지난해 성적은 4승 11패로 저조했다. 올해 성적은 3승 1패로 괜찮아 보이지만 지난 11일 사직 한화전이후 3경기에서 겨우 5이닝씩을 버티는 등 투구 내용이 좋지 않아 지난 24일 1군에서 말소됐다.

서준원은 입단후 ‘10년-100승’을 거둘 유망주였으므로 지난 한해는 2군에서 기본기부터 철저히 익혔다면 올해 2,3선발로 팀의 상승세에 큰 보탬이 됐을 것이다. 1군 선발로는 타자와의 두뇌 싸움, 볼 배합, 견제 요령, 투수앞 땅볼 처리가 여전히 미숙한 탓이다.

2015년 시즌부터 5년간 10승 25패를 거두고 지난 1월 상무 입대한 엄상백(24) 역시 아쉽다. 엄상백은 2014년 덕수고 3년 시절 5승을 따내 초고교급 투수라는 극찬을 받으며 신생팀 KT 위즈에 입단했다.

하지만 19세의 어린 선수가 KBO 리그의 내로라하는 타자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창단팀이라 1승이 급했지만 엄상백을 몇 개월이라도 2군에서 기본기를 익히게 했다면 5년차에는 10승 투수로 성장했을 것이다.

고교야구 최고 투수로 평가되는 강릉고 김진욱이 김해고와의 결승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다시 강릉고 김진욱으로 돌아가자. 요즘 매스컴은 김진욱을 격찬하기에 바쁘지만 지난 22일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결승전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기대에 못미쳤다.

1-1인 2회초 1사 3루에서 올라온 김진욱은 2타자를 범타로 처리해 급한 불을 껐다. 강릉고는 2회말 공격에서 1점을 보태 2-1로 리드, 투구 최대치인 105구를 던질 수 있는 김진욱이 예상대로 호투를 이어갔다면 강릉고의 창단 우승은 따논 당상이었다.

하지만 김진욱은 3-2로 승리를 눈앞에 둔 9회초 2사 1,2루 볼카운트 1-1에서 105구 제한에 걸려 강판됐다. 이어 나온 투수들이 몸에 맞는 공과 밀어내기 4구로 동점과 역전을 어이없이 허용해 3대4로 패배,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2회 1사후에 등판했다면 김진욱의 구위를 볼 때 9회까지 105구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승리 일보직전에서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을까. 김진욱의 등판전 감독은 분명히 정면 대결로 105구 이내 승부를 지시했을 것이고 김진욱 역시 ‘105구 승리’를 자신했을 것이다.

김진욱의 투구 자세가 문제였다. 김진욱은 던질 때 어깨와 팔에 너무 힘이 들어가고 공을 릴리스할 때 머리쪽에서 하니 컨트롤이 제대로 안돼 투구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황금사자기 우승팀 에이스인 김유성은 김진욱보다 더 했다. 1-2로 뒤진 2회말 2사 2루에서 구원등판한 김유성은 1-3인 8회말 2사 1루에서 ‘105구 제한’에 걸려 강판당했다. 이닝당 17.5구를 던진 김유성은 14.3구의 김진욱보다 매 이닝 공 3개 이상을 더 던졌다. 이유는 하이 패스트볼이 많기 때문이다.

투구의 기본은 낮게 던지는 것인데, 김유성은 높은 볼을 주로 던지다 보니 투구수가 많아지고 타자를 압도하지 못한 것이다(반면 서울고 졸업반 최우인은 우완 정통파 투구폼을 제대로 익힌데다 파워가 넘쳐 큰 기대를 모으고 있음).

김진욱과 김유성은 단점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내년 시즌 2군이 아닌 1군에 등록돼 10승 투수로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투수가 될 확률이 높다. 김진욱과 김유성이 기본기를 익히지 못한 건 초중고 시절 좋은 지도자를 만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소프트볼연맹은 순회코치를 적극 활용해 어린 유망주들을 처음부터 잘 키워야 한다. 프로 1,2군에서도 ‘눈앞의 승리’보다 투수의 장래를 위해 체계적이고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타자 부문도 문제가 많다.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한 김해고 주전 9명중 좌타자는 두명이었다. 준우승팀 강릉고에는 단 한명뿐이었다. 프로 입단후 양손을 쓰는 스위치 타자를 키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초중고 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안목으로 선수를 육성시키는지 답답할 뿐이다. 수많은 야구인들이 이런 참담한 실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실은 더욱 답답하다. 본지 객원기자/前 스포츠조선 야구大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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