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걷는 남자'의 실제인물인 필립 프티가 박흥진 위원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의 실제 주인공 프랑스 태생 필립 프티(66)와의 인터뷰가 지난달 뉴욕의 리츠칼튼호텔에서 있었다. 그는 지난 1974년 8월 7일 뉴욕 맨해튼의 쌍둥이빌딩 월드 트레이드센터의 양쪽 꼭대기 사이에 쇠줄을 맨 뒤 안전장치 없이 균형봉 하나만을 들고 두 건물 사이를 여덟 차례를 왕복해 걸은 인물. 영화 속에서 그의 삶을 조셉 고든-레빗이 연기한다.

빨강 머리의 프티는 나이답지 않게 젊게 보이는 데다가 생명력으로 가득 찼는데 장난꾸러기 아이 같았다. 시종일관 인터뷰도 일어서서 마치 춤 추고 연기 하듯이 야단스런 제스처를 써 가면서 했다. 속사포 같은 속도로 위트와 유머를 마구 뒤섞어 질문에 대답했는데 인터뷰에 자기가 쌍둥이빌딩 사이를 걸었을 때 신은 발레화 같은 신발과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할 때 쓴 활 그리고 길에서 재주와 묘기를 보일 때 쓴 톱해트를 가지고 와 보여 주면서 자랑했다. 그는 현재 뉴욕주 캣스킬에 살고 있다.

-영화에서 재현된 당신의 삶과 공중 보행을 보고 느낀 점은?

“저메키스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은 것은 9년 전이다. 처음에는 내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만들려고 했다(영화에서는 고든-레빗이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에서 해설한다.) 처음엔 내 자문을 100% 받았으나 후반에 가선 얼마 안 받았다. 그래서 다소 걱정이 됐다. 그러나 난 영화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영화가 나와 쌍둥이빌딩 그리고 내 모험의 정신을 살려 보여준 것에 만족한다. 물론 공중 보행을 제외한 영화의 많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쌍둥이빌딩이 9/11 테러로 무너졌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난 여기 그 참상의 슬픔과 공포를 이야기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삶의 슬픔과 기쁨의 균형을 이야기하기 위해 왔다. 당신의 귀중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해도 삶을 멈춰서는 안 되고 삶이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난 늘 쇠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안다. 한 쪽으로는 눈물과 슬픔이 있지만 다른 한 쪽으로는 삶의 기쁨과 기억이 있다. 이 영화도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신의 미국에서의 공중 보행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내가 노트르담 성당의 두 탑 사이를 걸었을 때 전 세계가 그 사실을 1면에 보도했지만 유독 프랑스 신문들만 무시했다. 속 좁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그 이후로 난 프랑스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난 수 십 년 동안 그들은 예술가로서 나를 고국에 초대하는 것에도 매우 인색했다. 그러나 온 세계가 날 반기기 때문에 프랑스가 날 홀대한다 해도 신경 안 쓴다.”

-그 날의 일 중 공중 보행 말고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 뉴욕에 온 뒤로 8개월 간 묘기를 보이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난 영화에서처럼 무언극은 안 했다. 그리고 모자를 돌려 가면서 관중들로부터 돈을 받았는데 그 것은 결코 구걸이 아니다. 늘 경찰이 잡으러 오곤 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내 빼곤 했다. 마침내 거사의 날이 왔다. 쌍둥이빌딩 북쪽타워에 올라간 내 친구 장-루이가 내가 있는 남쪽타워로 화살을 쏴 날려 보냈다. 건물 사이를 쇠줄로 연결하는 도구다. 화살의 끝이 뭉툭하긴 했지만 그것에 찔릴까 봐 아슬아슬했다.”

-고든-레빗이 당신과 닮은 데가 없는 점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가.

“난 완벽주의자가 돼서 세상의 모든 것이 늘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인 만큼 마음에 거슬릴 것까진 없다. 영화란 늘 인물과 진실을 다소 꾸며대기 마련 아닌가. 영화에서 내가 쇠줄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실 아니다. 난 한 번도 줄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조셉 고든-레빗은 매우 훌륭한 배우로 난 그를 8주간 훈련 시켰다. 그는 그 동안에 줄타기뿐만 아니라 내 속사포식 말하기와 제스처와 표정도 연구했다. 날 훌륭하게 표현한 고든-레빗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신은 죽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죽음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난 죽음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깔본다고 해야 옳다. 나는 줄 위에 올라 균형봉을 잡고 걷기를 시작, 첫 걸음이 성공하면 끝까지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곤 한다. 거기엔 절대로 의문이 없다. 난 결코 ‘아이구머니 줄이 날 잘 받쳐 주기만을 바란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확신이 있기에 줄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그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긍정이다. 난 결코 내 생명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신비롭고 고상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 것은 요가와도 같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당신의 보통 삶의 스타일이란 어떤 것인가.

“난 도구를 사랑하는 기능공이다. 그 도구란 어떤 때는 공중 돌리기용 공일 수도 있고 쇠줄 위의 균형봉일 수도 있으며 또 목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난 18세기 목수의 도구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그리고 난 불가능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죽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제외하기 위해선 먼저 불가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또 난 투사다.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 집요한 작은 쥐다.”

-매일 운동을 하는가.

“한다. 사람들이 내가 66세라면 모두 놀란다. 그 나이에 아직도 죽지 않고 온갖 묘기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난 내가 늙는다는 것을 잊고 산다. 지금도 주 6일 하루에 3시간씩 줄타기 연습을 한다.”

-그 날 줄을 타면서 바람의 변화나 거리의 소음에 대해 신경이 안 쓰였는가.

“그 것에 대해 준비를 했다. 내가 에펠탑을 걸었을 때도 기상청을 방문해 과거 10년간 에펠탑 주위의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관한 자료를 연구한 뒤에 걸었다. 그러나 막상 줄 위에 올라 가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정확히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쌍둥이빌딩 사이를 걷기 전에 난 건축인부로 위장하고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밑의 소음을 조사했다. 철저히 빌딩과 친해지려고 했다. 빌딩을 내 가족처럼 아는데 8개월이 걸렸다. 따라서 그 뒤론 공포나 걱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난 염려란 말에 신경 안 쓴다. 난 늘 신경을 총 집중해 만반의 준비를 한 두에 실행에 들어간다.”

-8차례 왕복에 얼마나 걸렸는가.

“난 그 때 시계를 안 차서 몰랐지만 후에 친구들이 45분간 줄 위에 있었다고 알려 줬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게 있어 영원일 수도 있고 또 순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시간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안 늙는 것도 그 때문이다."

-8차례 왕복은 계획했던 것인가.

“한 번 건너간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사전에 계획한 것이 없었다. 난 돈이나 신기록이나 명성 때문에 공중 보행을 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내가 걷다가 줄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생각한 것은 사실인데 타워가 날 부르고 있다는 걸 느꼈었다. 그 후 난 예술적 연기가 하고 싶어서 왔다 갔다 한 것이다. 내가 ㅇㅚㅆ다 갔다 한 것은 경찰이 빌딩 꼭대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난 하늘에서 시를 쓰는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줄 위를 걷고 그 위에 앉고 또 누운 것은 다 즉흥적인 연기였다.”

-그 때 당신을 도와준 친구들은 그 뒤 어떻게 됐는가.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일부는 내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고 또 일부는 내 성공에 대한 시기와 부러움 때문에 내게 등을 돌렸다. 특히 내 공중 보행을 담은 기록영화 ‘줄 위의 남자’가 오스카상을 받은 것이 그런 질투의 원인이 됐다. 슬픈 일인데 내겐 그들이 여전히 나의 친구들이다.”

-당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쌍둥이빌딩 다음으로 내가 공중 예술을 표현한 것은 뉴욕에 있는 성요한 성당의 16층 높이를 걸은 것이다. 그 때 성당의 두 탑은 채 완공되지 않았을 때로 공중 보행이 성공리에 끝나자 성당의 주교가 내게 성당전속 예술가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니까 난 등에 혹이 없는 현대판 콰지모도다. 난 지금 세계를 돌면서 공중 보행을 하고 있다. 다음 목표는 남미의 이스터 아일랜드에 있는 모아이 석상들에서 쇼를 하는 것으로 라파 누이 원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겸한 축제를 열 예정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뉴욕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묘기를 보여주고 있다. 내 몸이 말을 안 들을 때 까지 계속할 것이다.”

-쌍둥이빌딩 공중 보행 후 인간적으로 변한 점이라도 있는가.

“없다. 내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져 내 인생이 바뀌긴 했지만. 내게 있어 명성과 돈이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험 이후 내 인생이 직업적으로는 바뀌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다.” 박흥진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겸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원 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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