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6학년 때 핸드폰 사준다는 말에 당구 입문
14년만에 LPBA 정상급 선수로 성장

[스포츠한국 김동찬 기자] ‘한국 당구의 미래.’ LPBA 3회 연속 우승 경력 이미래(27, TS샴푸 히어로즈) 선수에 따라붙는 별칭이다.

당구큐를 잡은 지 14년. 그동안 그가 이룩한 캐리어는 간단치 않다. 국내 여러 대회 우승에 이어 2016년과 2017년에는 세계여자3쿠션선수권대회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 국제적 성가를 높였다. 당구 영재에서 탑클라스 프로선수로 성장해가고 있는 이미래를 분당 서현동 소재 그의 클럽에서 만났다. [대담 = 이종석 스포츠한국 부사장]

당구선수 이미래가 8일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의 미래당구클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 당구의 출발점 ‘아버지'

이미래 당구 인생의 출발과 성장과정은 모두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 인터뷰 내내 그의 당구 스토리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당구장에 처음 가본건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릴 때였어요. 당시 부모님이 함께 당구아카데미를 다니셨는데 어린아이인 저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으니까 아카데미 가실 때마다 저를 데리고 다니셨지요.

당구큐를 정식으로 잡은 건 초등학교 6학년때였어요. 아버지가 다니던 아카데미에서 4구 대회를 개최했는데 마침 여성 참가자가 부족했던 거죠. 아버지가 대회에 참가하면 핸드폰을 사주시겠다며 출전을 권유하셨어요. 핸드폰 욕심에 무조건 참석하겠다고 했지요.”

그저 핸드폰을 얻기 위해 출전한 대회였지만 ‘당구 영재’ 답게 꽤나 잘쳤고 주변의 평판을 얻게 된다. 그렇게 그의 당구 인생이 시작된다.

“대회 전에 아버지가 당구치는 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대회 나가서 그대로 쳤는데 제법 잘 쳤던 것 같아요. 우승은 못했지만 순위에는 들었지요. 아카데미 원장님은 물론 강사님들 모두 당구 가르치라고 한목소리를 내셨고, 그렇게 당구를 배우게 됐어요. 아버지가 공을 배치해놓고 방법을 가르쳐주는 식이었지요. 그 후 몇차례 더 4구 대회에 출전했는데 성적을 내지 못하고 매번 떨어지자 아버지가 상심하셨는지 더 이상 저와 당구장을 안 가시는거에요. 대신 어머니가 저를 당구장에 데리고 가서 공을 놓아주셨어요.

그 때 그 당구장에 대대 테이블이 있었는데 실장님이 4구 말고 대대에서 3쿠션을 쳐보라고 권유하시는거에요. 그 분이 시키는대로 이것 저것 해봤는데 곧잘 따라 했던 것 같아요. 이후 대대에서 9점을 놓고 3쿠션을 치기 시작했지요.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는 다시 나오셔서 본격적으로 3쿠션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죠.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3쿠션 대회에 나가 입상을 했어요. 그 때 부터 정식으로 3쿠션을 하게 된 거죠.“

당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으로 그는 스스로 운동신경이 있는 편이었고, 마침 아버지가 퇴사할 즈음이어서 지도할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저에게 당구를 시키신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꽤 잘했기 때문이었어요. 초등부이긴 하지만 검도로 도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기도 했죠. 마침 아버지가 회사를 퇴직하고 시간이 있을 때였고, 다섯살 위 오빠가 당구를 안하겠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저를 당구로 이끄신거죠.”

당구선수 이미래가 8일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의 한 음식점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 엄격한 코치 ‘아버지’ 그리고 스승들

이미래는 당구의 기초를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스트로크와 시스템을 아버지가 직접 가르쳤다. 딸을 가르치는 과정이었지만 아버지는 꽤나 엄하게 그를 지도했다.

“아버지는 정말 스파르타세요. 호락호락 만만하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한 번 하면 거의 뭐 전력투구 하듯이 하셨지요. 제 입장에서는 재미도 없고 허리도 아프고 너무 힘든 거예요. 진짜 억울했던게 어려운 시스템을 알려주시곤 이걸 왜 바로 이해 못하느냐며 혼을 내실 때였어요. 어린 나이에 많이 힘들었지요. 그런 상태에서 대회는 계속 나가야 되고 또 대회 나가면 성적을 내야 했어요. 제가 승부욕이 있어서 지는 걸 싫어해요. 배우는 과정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안하면 대회에서 지니깐 더 배우게 되고…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기에 자발적으로 만족하며 배워나가던 시기는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속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저를 지금의 당구 선수로 만드신 건 전적으로 부모님 덕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갔다오면 어머니가 차 태워서 바로 당구장 가서 공 놔주고 새벽에 집에 들어오곤 했죠. 사춘기였던 저로서는 그런 생활이 힘들었어요. 당구 그만두고 싶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아홉살 위 언니랑 방을 같이 썼는데 제가 저녁마다 울면서 하기 싫다고 하니까 아버지한테 가서 저렇게 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시켜야하냐고 얘기했다가 엄청 혼나기도 했죠.“

아버지 외에 다른 스승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몇 분 계시다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당구 원서로 직접 공부를 하셨고 독학으로 독자적인 시스템도 만드셨어요. 그걸 저한테 알려주셨는데 그게 정말 잘 맞았어요. 아버지한테 많은 걸 배웠지요. 이후 제가 대회에 나가서 성적을 내자 공을 가르쳐 주겠다며 자원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너 지금 누구한테 배워? 배우는 사람 없으면 나한테 배워볼래” 이런 식이었는데 제가 아버지한테 배우고 있다고 하면 “그래선 안 된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거기서 스트레스를 많아 받았지요. 아버지도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당시 가장 좋아하시던 이충복 선수를 찾아 가서 공을 배우도록 지원해주셨어요. 그 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처음 큐를 잡은 6학년 시절부터 3쿠션 대회에 출전해 수상한 모습. 사진=이미래 선수 제공
이미래는 아버지로부터 기초를 배우고 2단계로 이충복 선수에게 좀더 디테일한 공을 배우게 된다.

“1년 정도 공을 배우던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부모님께 ”미래는 궁금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하더래요. 질문도 없고 그냥 와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그것만 하고 간다는 얘기셨죠. 그 때 제가 당구에 열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보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을 떠나 아버지한테 공을 배우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지요. 제가 생각해도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은 거예요. 아버지는 선수생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데 앞으로 선수 생활을 계속하려면 필요한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선생님 다시 가르쳐주세요’ 하고 찾아갔지요.”

김규식 해설위원, 선지훈, 강민구, 비롤 위마즈 선수도 그에게 도움을 준 스승으로 꼽았다.

“2016년도에 죽방전설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때 PD님이 저한테 예술구를 좀 준비해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예술구를 칠 줄 몰랐거든요.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던 차에 같이 출연한 김규식 해설위원님이 직접 알려주시겠다고 해서 김 위원님한테도 한 반년 정도 공을 배웠습니다. 프로로 데뷔하고 나서는 사실 도움 받은 분들이 많아요. 특히 강민구 선수, 선지훈 선수 등에게 찾아가서 원 포인트 식으로 얘기를 듣고 다시 저 혼자 생각하고 고민해서 이게 이렇게 되는 거구나 이해하면서 배우고 있어요. 비롤 위마즈 선수에게도 기억에 남는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 당구는 나의 인생

이미래가 당구에 스스로 흥미를 느끼고 열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넘어 이제 자신만의 공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15년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공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걸 왜 기억하냐면 2017년도 세계선수권 대회를 나갔는데 대회 나가기 한 달 전에 제가 손목에 깁스를 하게 된 거예요. 세계선수권에서 더 잘할 수 있고 우승할 수 있을 것처럼 준비를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자 손목 때문에 결과가 안 좋았나 싶고 아버지와도 의견충돌이 생겼습니다. 공을 배우는데 있어서 제가 주장하는 바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까 부딪히는 일이 생긴거죠. 내 공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때 들었어요. 그제서야 당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더군요.그래서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죠.”

스트로크로 인해 손목이 망가져 수술을 받았던 정황과 최근의 부진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스트로크 때 큐를 똑바로 움직이게 하려면 손목을 굽혀야 합니다. 팔로우를 넣으려면 더 접어야 돼요 근데 이걸 계속하니까 손목에 무리가 와서 팔꿈치 터널 증후군 수술을 받았어요. 팔이 저려서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었죠. 고집하다간 선수 생활을 일찍 끝낼 수밖에 없는 스트로크여서 많이 바꾸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스트로크를 바꾸는 건 굉장히 큰 변화거든요. 사실 지금 공치는게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당구선수 이미래가 8일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의 한 음식점에서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지난 시즌 마지막 왕중왕전에서 고의 수비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 멘탈이 많이 무너졌죠. 내용적인 부분을 떠나서 제가 남들한테 비난받는 거에 좀 약해요. 실제 내용에 있어서 저는 떳떳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테이블에만 서면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계속 신경쓰이고 그래서 아직도 제 공을 잘 못치겠어요.“

올 시즌 그의 성적은 초라하다. 예선 탈락이 이어졌다.

“3차 4차 투어까지 계속 예선 탈락할 때는 굉장히 괴로웠어요. 이번 시즌 시작하고 제가 16강 딱 한 번 갔거든요. 나머지 다 예선 탈락이고 힘들었는데 이유가 있으니까 앞으로 더 잘 칠 수 있다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아무 변화가 없는데 성적이 저조하면 슬럼프지만 어쨌든 이유가 있는거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 경기로는 LPBA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메디힐 챔피언십 결승전을 꼽았다.

“메디힐 마지막 세트에서 제가 9점을 한 번에 끝냈거든요. 그 당시에는 퍼펙트큐가 없어서 너무 아쉽지만 하여튼 그 때 당시에는 제가 하고 싶은 걸 전부 다 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공이 다 됐어요. 스스로 뭔가 해내서 일군 우승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기뻤지요.”

넘고 싶은 선수를 꼽아보라는 질문에는 세계 랭킹 1위 테레사 클롬펜하우어(네덜란드) 선수를 꼽았다.

“지금 제 목표는 평균 에버리지를 1.2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다음 시즌 정규 투어 2회 우승, 왕중왕전에서 우승하는 거예요. 지금 부진을 겪고 있지만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장시간 인터뷰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사장님이 유명 프로선수가 왔다며 사인을 요청했다. 멋쩍으면서도 해맑게 웃는 그에게서 다음 시즌의 밝은 기운이 엿보였다.

당구선수 이미래가 8일 경기도 분당구 서현동의 미래당구클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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