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모두에게 처음은 있다. 진짜 ‘처음’이 처음일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각인된 ‘처음’만큼 강렬한 순간은 없다.

메시, 셰프첸코, 박지성. 한 시대를 풍미했거나 풍미하고 있는 그들이 축구전설이 되기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린 바로 ‘그 경기’를 다시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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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트트릭이 ‘엘 클라시코’… 메시의 시작

지금은 축구 그 자체로 수식어가 필요없는 리오넬 메시. 그런 메시에게도 ‘유망주’ 시절은 있었다.

물론 유망주라 해도 10대에 이미 바르셀로나의 주전을 꿰찬 그였지만 2007년 3월까지는 ‘호나우지뉴의 팀’인 바르셀로나에서 호나우지뉴를 보조하는 역할 정도였다.

2007년 3월 10일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간의 ‘엘 클라시코(El Clasico)’ 경기는 바르셀로나가 호나우지뉴의 팀에서 메시의 팀으로 이동하는 변곡점으로 기억된다.

원정팀 레알 마드리드가 전반 5분만에 판 니스텔루이의 선제골로 앞서간다. 이에 아직 만 19세였던 메시는 전반 11분 사무엘 에투의 패스를 이어받아 오른쪽에서 왼발 감아차기 슈팅으로 동점을 만든다.

그러나 동점골 후 2분만에 바르셀로나는 페널티킥을 허용하고 판 니스텔루이가 또 골을 넣어 1-2로 뒤진다. 그러자 메시는 전반 28분 왼쪽에서 호나우지뉴의 슈팅을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가 막아낸 공을 왼발 강력한 발리슈팅으로 2-2 동점을 만든다. 판 니스텔루이가 넣으면 메시가 따라잡는 공방전은 계속된다.

후반 28분 세트피스에서 레알 마드리드 세르히오 라모스가 헤딩골을 넣어 레알 마드리드의 3-2 승리로 종료되나 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게는 10대 소년이 있었다.

후반 추가시간 호나우지뉴의 침투패스를 이어받은 메시는 중앙에서 홀로 개인 드리블 돌파로 수비를 완전히 젖힌 후 강력한 왼발 슈팅을 때렸고 카시야스 골키퍼를 지나 골문을 가른다. 후반 추가시간 2-3의 경기는 3-3 동점으로 종료된다.

이 경기는 이후 50번 넘게 해트트릭을 달성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선수가 되는 메시의 사상 첫 해트트릭 경기로 남게 된다.

메시 스스로도 훗날 인터뷰에서 “생애 첫 해트트릭이었을 뿐 아니라 레알마드리드를 상대로 한 골이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해트트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반 사모라노(1995년 1월 8일. 5-0 레알 승)이후 13년 만에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선수이자 역대 최연소 엘 클라시코 해트트릭 달성자가 된 메시다.

이 시즌에서 처음으로 시즌 두 자리 숫자 득점에 성공한 메시는 다음 시즌부터 호나우지뉴의 빠른 몰락이 시작됨과 동시에 ‘티키타카’가 정착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세계 최고의 선수로 자리 잡는다. 2007엘 클라시코 해트트릭이야말로 메시라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2007 3월 엘클라시코 메시의 모습.ⓒAFPBBNews = News1
▶무명의 동유럽 21세 선수의 누캄프 폭격…셰프첸코의 시작

1997년 11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이 누캄프. 루이스 피구가 주장 완장을 차고 히바우두가 나선 바르셀로나는 우크라이나의 명문이지만 스페인 입장에서는 작디작은 디나모 키예프와 유럽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경기를 치른다.

홈경기이기에 당연한 승리를 기대했던 바르셀로나 팬들은 전반전 45분이 끝나기도 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한 무명의 선수가 전반 44분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바르셀로나를 폭격했기 때문.

전반 9분만에 오른쪽에서 왼발로 감아올린 프리킥에 멋진 헤딩슛을 넣은 안드리 셰프첸코는 전반 32분에는 골키퍼와 공중볼 경합을 몸싸움으로 이겨내고 또 헤딩골을 넣는다. 전반 44분에는 스스로 페널티킥을 만들어낸 후 침착하게 성공시켜 해트트릭을 완성한다.

2개월 전 고작 스무살을 넘긴 셰프첸코라는 무명에게 바르셀로나는 대망신을 당했고 셰프첸코는 디나모 키예프의 4-0 원정 대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이때의 바르셀로나는 해당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는 강팀. 그런 바르셀로나 적진에서 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해트트릭을 달성한 셰프첸코는 동유럽에서 인정받던 유망주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공격수로 각광 받는다.

결국 셰프첸코는 이탈리아 AC밀란으로 떠나 매해 20골을 넣는 대선수로 거듭나고 잉글랜드 첼시로 이적할 때는 EPL 역사상 이적료 1위이자 당시 역대 이적료 4위인 한화 약 600억원에 팀을 옮긴다.

경기화면 캡처
▶박지성, 세계에 이름 알린 AC밀란전… 맨유행 발판 마련하다

2002 한일월드컵 포르투갈전 골을 통해 국민적 영웅으로 거듭난 박지성. 하지만 당시만해도 국제적으로는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든 유망주’정도가 박지성을 향한 시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J리그를 거쳐 유럽 중소리그인 네덜란드 리그 PSV 아인트호벤에서도 주전경쟁에 힘들어했기 때문.

하지만 적응을 마친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 감독 아래 PSV의 핵심전력으로 거듭나고 2004~2005 유럽 챔피언스리그는 박지성이 본격적으로 유럽 빅클럽의 관심을 받는 경연장이었다.

그러나 AC밀란과의 4강 2차전이야말로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무조건 영입할 선수’로 박지성을 낙점한 결정적 경기이자 박지성의 이름을 전세계에 각인시킨 경기였다.

4강 1차전을 0-2로 패한 PSV는 2차전 역전이 간절했다. 박지성은 당대 최고의 팀이자 파울로 말디니-야프 스탐-네스타-카푸로 이어지는 ‘철의 포백’을 상대로 전반 9분만에 선제골을 뽑아내며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PSV가 3-1로 승리했음에도 원정경기 다득점으로 인해 아쉽게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이 경기는 2004~2005 유럽 챔피언스리그 최고의 명경기로 회자된다. 박지성은 이 경기의 주인공으로 당대 최고의 팀을 절벽 끝까지 밀고 간 선수로 세계에 각인된다.

이 경기를 계기로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 영입을 확신하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박지성을 영입한다. 이 경기가 아니었다면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며 박지성이라는 이름은 단지 한국에서만 기억되는 선수가 됐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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