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던 날'서 세 여성의 연대 그리며 위로 전해

배우 김혜수 /사진=호두엔터테인먼트
[스포츠한국 모신정 기자]

배우 김혜수하면 생각나는 첫 마디가 여전히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영화 '타짜' 정마담의 대사 한 소절이라면 당신은 그녀에 대해 정말 많은 걸 놓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해 초 한 영화상 시상식에서 수상이후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중년의 팬들을 위해 이동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사인지 한 장마다 일일이 팬의 이름을 물어봐가며 사인을 하는 김혜수를 목격하며 저 모습이 16세 때 데뷔해 배우이자 톱스타로 34년을 지내온 김혜수의 본질 중 한 단면일 것이라 여겨졌다.

반평생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대중들을 울고 웃게 하며 작품으로서 만족시켜야 하는 삶을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구나 그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장르적 재미와 극화된 캐릭터의 매력이 만개한 '타짜'(2006/최동훈 감독)나 '도둑들'(2012/최동훈 감독을 꼽지만 그의 시선과 욕망은 보다 멀고 깊은 곳을 늘 향해 있다. 어떤 누구라도 삶 속에서 겪었음직한 희노애락의 감정과 상실과 분노, 절망과 희망 등 극한의 감정들을 그린 작품들로 선택의 길을 넓혀가는 그의 여정에 동행하다 보면 나를 묵직하게 내리 누르고 있던 어떤 깊은 감정의 근원들이 정화되는 놀라운 경험이 뒤따르기도 한다. 특히 '내가 죽던 날' 이전 최근작인 '국가부도의 날'(2018/최국희 감독)에서는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시현 역을 맡아 극의 흐름 전체를 앞장 서서 이끄는 전무후무한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선보이며 그가 왜 충무로에서 여전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입증하기도 했다.

김혜수가 신예 박지완 감독과 이정은, 노정의와 함께 진심을 다 해 만든 영화 '내가 죽던 날' 또한 그런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주는 영화다.

"극초반 미스테리 장르의 형사물이라는 느낌이 극적 긴장감을 높여줘서 관객들을 잘 이끌어주잖아요. 주요 배역이 형사이고 사건의 주요 증인인 소녀이다보니 뭔가 파헤치는 영화로 보실 수 있는데 더 강조된 점은 세 인물들의 각자 감정의 여정을 겪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운 좋게 좋은 배우들을 만나서 그 시너지들이 좋게 작용했습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노정의)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현수(김혜수),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이정은) 세 사람이 살아남기 위한 각자의 선택을 그린 영화. 김혜수는 사라진 소녀를 추적하는 형사 현수 역을 맡아 사건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의 집요함과 일상이 무너진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냈다.

그가 '내가 죽던 날'의 대본을 택한 시기는 '국가부도의 날'의 촬영을 마쳤을 무렵이었다. 몇 권이 쌓여있는 대본 중 '내가 죽던 날'이 가장 위에 있었다. 김혜수가 연기한 현수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와 이혼 소송으로 직장 생활마저 위기에 놓인 형사 현수를 연기했다. 극 중 현수와 놓인 상황은 달랐지만 김혜수 또한 지난해 어머니의 빚과 관련해 피해를 입은 사연들이 불거지면서 한 차례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빚투 논란에 올랐을 당시 김혜수는 소속사를 통해 어머니가 십수년전부터 금전문제에 연루됐고, 그가 2012년 전 재산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빚을 부담하고 그 과정에서 모친과 관계를 단절했다는 사실을 밝힌바 있다.

"모든 작품들이 다 운명인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특별했어요. 제목만 봤을 때 마치 운명 같았다고 할까요. 이 시기에 이 글이 내게 온 건 정말 운명 같았어요.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고 할까. 언론에 제 개인사가 알려진 건 작년이지만 제가 (모친 빚투)안 건 2012년이었어요. 우리 영화에서 현수가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았다. 정말 몰랐다'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때 (빚투)당시 제가 그 말을 실제 했었죠. 그 때 저는 일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제가 (연예계) 일을 시작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생각도 들었죠. 당시 주변에 '이 일을 안 할 거고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은 해야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 가까운 친구가 '선배 3년만 죽었다 생각하고 일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때 한 작품이 '직장의 신'과 '관상'이에요. 일을 할 때 만큼은 제 상황을 잊을 수 있었어요. 마치 제 현실처럼 견디며 연대하는 극 중 주인공들을 보며 이 작품에 끌리게 됐죠."

최악의 태풍이 섬에 도착한 날 경찰의 증인으로 유배되다시피 섬에 발이 묶여 홀로 살아가던 소녀는 절벽 근처에 운동화 한 켤레를 고이 벗어둔 채 사라지고,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 조정 상태에 놓여있는 현수는 남편 쪽에서 직장 내에 불미스러운 소문을 냈고 불의의 교통 사고를 내는 바람에 징계 위기에 놓여 있다. 징계 없이 경찰에 복귀하기 위해 실종된 소녀 세진의 일을 조사하고 사건 종결을 시키라는 상사의 유무언의 압력에 그녀는 섬으로 향하게 된다.

"사실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 사이에는 깊고 끈끈한 무엇이 있죠. 각기 사연도 다른데 모두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각자 연결된 뭔가가 있고요. 그런데 이들이 각자의 사연으로 떠맡아야 하는 고통적이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현수는 처음엔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 세진의 손을 잡아주겠다는 의마가 아니라 '복직이라도 해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일을 시작했을 거예요. 그런데 완결된 사건의 보고서를 쓰다가 저 아이의 얼굴 속에서 내가 그렇게 보기 싫었지만 늘 보아왔던 나 자신의 얼굴을 본 거죠."

이정은이 연기한 순천댁은 남동생의 죽음 이후 사고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인물이다. 그 또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고 극 중 세진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인물이다. 김혜수는 이정은과의 호흡에 대해 인터뷰의 상당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깊은 교감이 있었음을 공개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어도 작품을 통해 이정은을 접하면서 어떤 역할을 해도 그 이상을 보여주고 느끼고 배울 점이 많은 배우라는 칭찬이 이어졌다. 현장에서도 말보다는 행동으로 항상 김혜수를 안아주고 감싸주는 느낌을 주는 이가 이정은이었다.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에서 순천댁과 현수가 마주 걸어오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은 대사도 많지 않고 정은씨는 대사도 없었죠. 너무 중요한 장면이어서 두려움도 있고 기대도 있었어요. 정말 잘 해야 하는 장면이라 새벽 일찍 현장으로 가고 있었어요. 저 멀리서 정은씨가 수레를 끌고 오는데 순천댁이 오고 있더라고요. 그 때는 슛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정은씨도 울고 있었어요. 서로 눈길이 부딪히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순천댁이자 동시에 이정은, 현수이자 동시에 김혜수가 서로 만난 거죠. 캐릭터로서의 감정과 실제 배우로서의 감정이 오가며 서로 연대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그 두 가지 자아가 만나고 또 상대방의 자아와 일치하는 순간이었어요. 저에게 너무 특별했고 난생 처음 겪는 경험이었죠. 제가 만나고 싶다고 만나질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고 캐릭터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순간만큼은 잊지 못할 거고 영원히 기억할 것 같아요. 그 장면만으로도 이 작품의 결과와 상관 없이 제게 너무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인터뷰 자리에 나서는 김혜수는 매번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신앙심 깊은 신도처럼 연기관과 배우관에 대해 진정성 넘치는 답을 내놓곤 한다. 30년 넘은 연기 베테랑인만큼 매체를 만나온 경험과 횟수 또한 그 어느 대배우 못지 않을 터인데 연기에 대한 화제에서만큼은 바늘끝 만큼의 농담조차 꺼내지 않는 그녀를 볼 때면 경외심이 인다. 3년 전 우연히 TV에서 '밀양'의 송강호와 전도연을 보며 "나는 여기까지"라며 은퇴까지 생각했고 그러다 몇 개월 후 '국가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받고 다시 일이 하고 싶어 피가 솟았다는 걸 보면 본인에 대한 평가에서만큼은 무서우리만치 박하지만, 연기 욕망과 열정만큼은 소녀 시절의 그것만큼이나 여전히 뜨거운 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새 34년차 배우가 됐어요. 제 기사에 은퇴 운운하는 내용이 나가고 나서 주위 사람들 전화를 꽤 받았어요. 하는데까지 한다고 하는데 나만 부족한 것 같고 그래도 다시 하게 되고 또 '다시는 안해' 이러기도 하고요. 보통 작품을 시작하기 전 부담이 가장 큰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다시 정신이 나가서 하겠다고 하죠. 연기를 잘 한다는 기준은 뭘까요. 연기를 정말 잘 하는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분노가 일고 가슴으로 느끼게 되잖아요. 배우의 입장에서는 감정의 진심과 집중도와 적절한 기교까지 모두가 조화로워야 하는데 항상 연기를 잘 하고 싶고 잘 하는 배우들을 부러워하고 동경해요. 카메라 앞에서의 관건은 내가 이 캐릭터로서 얼마나 정직할 수 있는가에요. '정직해야지'하고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연기 100가지를 미리 준비했다 해도 카메라 앞에서는 다 잊고 해야하죠. 어느 순간 해낼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도달 못하고 겉돌기도 해요. 다만 관객분들과 기자들께 부탁 드리고 싶은 건 어느 배우도 게으르지 않아요. 어떤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요. 우리 직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항상 새로운 걸 증명해내야만 해요. 꾸준히 오래 했지만, 가능성이 있지만, 무언가를 뛰어넘지 못한 배우들에게 판단이나 평가를 유보해주시면 어떨까 당부드리고 싶어요. 제가 들은 가장 큰 칭찬 중 하나가 '당신의 다음이 기대된다'는 거였는데 저를 늘 기다려 주신 대중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어요.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많은 배우들이 다음, 또 다음을 살아내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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