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미시간벤처캐피탈
[스포츠한국 최재욱기자] 5월은 가족의 달. 그러나 갈수록 핵가족화 되는 요즘 가족의 전통적인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언론에서 하루 걸러 흘러나오는 친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존속 폭행 등 패륜 사건을 다룬 뉴스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하게 하며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안긴다.

그러기에 전통적인 가족의 정이 더욱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만날 복닥거리며 싸우다가도 맛있게 된장찌개를 끓여 식사를 하면서 금세 화해하며 정을 나누는 가족은 정글 같은 이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근간이다.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감독, 제작 (주)지오엔터테인먼트)은 지친 현대인들의 가슴에 위로를 전달하며 아름다운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게 하는 힐링무비다. 또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준 이 세상 모든 할머니에게 보내는 헌사다. 그 어느 식당보다 더 깊은 맛을 지녔던 어린 시절 할머니 밥상의 미덕을 지녔다. 비싼 고기 반찬은 없어도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겨 더 맛있던 할머니가 차려주던 밥상. 그것의 소중함을 아는 관객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준다. ‘계춘할망’ 표 할머니 밥상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오색 나물=할머니의 밥상에서 직접 손으로 간을 맞추고 주물럭주물럭 무친 나물 반찬은 많은 현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늘 똑같은 재료와 조리법으로 무쳐도 그 맛을 재현할 수 없는 건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계춘할망’은 각기 다른 특성과 맛을 지닌 나물 반찬을 떠올리게 한다. 스토리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어린 시절 실종됐다가 12년 만에 제주도로 돌아온 손녀 혜지(김고은)와 하나밖에 없는 손녀를 잃어버리고 통한의 세월을 보냈던 해녀 할머니 계춘(윤여정)이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어 다시 가족이 돼가는 과정을 그린다. 대강의 줄거리만 들으면 우리가 TV 단막극서 많이 보아온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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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창감독은 오색나물처럼 다양한 기법을 줄거리에 삽입해 흥미를 돋운다. 마치 나물에 양념을 하듯이 미스터리 기법에 성장영화 코드, 반전이 들어가면서 스크린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계춘할망’의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진 건 혜지의 성장영화 코드 덕분. 어려웠던 가정 형편 때문에 탈선을 일삼던 혜지. 혜지는 할머니와 다시 만나면서 어린 시절 재능을 보였던 미술을 배우면서 가슴 속 상처를 치유해간다. 혜지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괴짜 미술선생 충섭(양익준)의 지도로 그림을 배우면서 닫혔던 마음의 문을 할머니에게 조금씩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이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한다.

#된장찌개=할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는 할머니 표 밥상의 화룡정점.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된장으로 완성된 깊은 맛은 오감을 건드리며 힘든 세상을 버티게 하는 자양분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윤여정과 김고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신구 여배우의 빛나는 연기는 된장찌개처럼 구수하면서도 뒷맛이 시원하다. 아무리 피를 나눴다고 하지만 오래 떨어져 살았기에 어색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와 손녀의 미묘한 심리를 실감나게 표현하면서 영화에 잔재미를 안긴다. 누가 일방적으로 이끌지 않는다. 누군가 끌어당기면 반대편에서 바짝 잡아당기며 팽팽한 연기대결을 펼친다.

윤여정은 관록의 여배우답게 누구나 가슴에 품고 살 만한 따뜻하고 자애로운 촌할머니의 모습을 정감 넘치게 소화해낸다. 겉으로는 못 배우고 단순한 촌할머니지만 손녀를 향한 가슴 속 사랑은 바다의 깊이처럼 절대 가늠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 뒤 드러나는 회한,아픔이 가득한 계춘의 복합적인 감정을 완벽하게 형상화해내 관객들을 눈물 짓게 한다.

손녀 김고은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다. 뭔가 목적이 있어 보이는 비밀을 지닌 냉소적인 소녀였다가 할머니의 사랑에 미소가 아름다운 여고생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가슴 뭉클하게 표현해낸다. 그가 왜 요즘 20대 여배우 중 가장 주목받는지를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한다.

이외에도 김희원, 신은정, 양익준, 최민호, 류준열, 박민지 등 조연들도 극의 조미료 역할을 제대로 하며 맛을 다채롭게 만든다. 특히 이웃사촌 석호 역을 맡아 처음으로 선한 역할에 도전한 김희원의 변신과 양익준의 개성 넘치는 연기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영화로 스크린 데뷔를 한 샤이니의 최민호와 무명시절 출연한 류준열의 악역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생선구이와 겉저리=어린 시절 할머니의 밥상에서 가장 난코스는 역시 생선구이와 한 잎에 먹기에 너무 큰 배추 이파리. 할머니들은 늘 손자손녀들을 위해 생선 가시를 맨손으로 일일이 다 발라주고 배추 이파리를 쭉쭉 찢어 밥 위에 살포시 얹어주곤 했다. 극중 여고생 혜지도 계춘이 일일이 생선을 손으로 발라 밥 위에 얹어 건네자 처음엔 난감해하지만 입에 넣으면서 할머니의 사랑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계춘할망’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창감독은 할머니의 이런 투박하면서도 깊은 사랑을 우직하게 표현해낸다. 작위적인 방법으로 감동을 이끌어내기보다 생선의 가시를 일일이 해체해 순살을 발라내는 마음으로 조각났던 가족의 재결합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들이 오해와 갈등, 용서를 통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면서 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표적’, ‘고사, 피의 중간 고사’를 만들었던 창감독의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 작품의 진짜 그의 색깔인 듯한 느낌을 주며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누구나 알듯이 아이들은 할머니가 가시를 일일이 발라주고 배추 이파리를 찢어주는 것을 나이 들어가면서 피하게 된다. 이런 ‘계춘할망’의 친절하면서도 명확한 순수 청정 코드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뻔하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굳이 입장료를 내고 극장에까지 가서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의구심도 들 수도 있다. .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눈요기를 위한 오락과 소비의 매체가 아니다. 모든 국민이 힐링이 필요한 요즘 같은 시절에 ‘계춘할망’ 같은 따뜻한 가족영화는 사막 위에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절대 억지로 울리는 최루성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 등 추억이 있는 관객들은 영화 결말부에 펑펑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없더라도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순 없다.

2002년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보면서 느꼈던 순수한 감동을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추억이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감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영화를 다 보고 극장에서 나갈 때 가슴 속에 따뜻한 온기를 품고 가족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할머니나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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