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2017년 10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A대표팀과 U-23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에 귀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02 한일월드컵 수석코치에서 점점 지위가 내려와 끝내 세미프로인 K3리그 창원시청 감독에서도 사임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였기 때문.

냉정하게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박항서 감독에 대해서는 ‘은퇴할 지도자’라는 평가가 돌았고 박 감독도 역시 이후 인터뷰에서 “베트남으로 간건 솔직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다른 감독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한국 프로리그에서 더 활동하기 힘들거라고 판단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의 동행이 끝난 2023년 1월. 그의 마지막은 베트남과 한국을 넘어 국제적인 뉴스가 됐다. 베트남 감독으로 활동한 5년 3개월여간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모조리 새로 썼고, 베트남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축구가 약한 지역으로 꼽히는 동남아시아 축구의 기준도 완전히 바꿔놓았다.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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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신드롬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지휘봉을 잡은 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성과는 바로 2018년 1월 열린 AFC(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이다. 여기서 박 감독은 베트남 U-23 대표팀을 이끌고 한국보다 높은 준우승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베트남 축구 역사상 첫 AFC 대회 결승 진출이었다.

이 대회를 통해 단숨에 베트남 축구 영웅이 된 박항서는 2018년 여름에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4강에 진출하며 베트남 통일 후 첫 아시안게임 4강의 역사를 썼다. 또 같은해 12월 열린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AFF(아세안축구연맹)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베트남에 우승컵을 10년 만에 안겼다. 2018년은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의 최절정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2019 아시안컵에서 베트남을 12년 만에 8강에 진출시켰고 2019년 말에 열린 동남아시안(SEA)게임에서 무려 60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까지 이룬다. 2020년에는 베트남 역사상 첫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진출하고 승리까지 안기며 박항서 감독은 변방이었던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 최강으로 바꿔놓았다.

▶박항서, 동남아 축구의 기준을 바꿔놓다

박항서 감독의 이런 성과는 단순히 베트남만의 쾌거가 아니다. 그동안 동남아시아 축구는 세계는커녕 아시아 축구와도 동떨어진 수준에 머물렀다. AFF컵을 월드컵만큼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우물 안에서만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이 아시아 모든 팀들이 참가하는 AFC U-23 챔피언십, 아시안게임, 아시안컵, 월드컵 최종예선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자 태국, 인도네시아 등 비슷한 레벨의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목표를 동남아시아에만 머물지 않고 아시아에서 어엿한 성과를 내는 것으로 수정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도네시아에 신태용 감독이 부임했고 말레이시아에도 김판곤 감독이 부임하며 높아진 ‘동남아시아 스탠다드’에 맞추려 노력 중이다.

이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하는 타 아시아 국가팀들도 ‘1승 제물’이 아닌 ‘까다로운 상대’ 혹은 ‘자칫하면 패할 수도 있는 팀’정도로 여기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월드컵에서 독일을 잡은 일본,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이긴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도 베트남은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0-1로 아쉽게 패하며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했던 것이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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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성과의 또다른 의의

사실 한국과 베트남은 외교적으로 그리 좋지 못한 관계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은 미국을 도와 군대를 파견했고 당시 베트남과 적국으로 전쟁을 치렀다보니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특히 베트남 입장에서 감정이 더 좋지 않을 수박에 없었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베트남 관광객이 많아지고 그 속에 성매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매매혼의 중심으로 베트남이 부각되면서 국제결혼의 폐해 등이 알려지며 베트남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K팝-K드라마 등 한류 열풍과 함께 박항서 감독이 등장하며 그동안의 악감정이 눈녹듯 사라졌다. 실제 베트남 국회의장 예방을 받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인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의 전력 강화에 기여를 하고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 박항서 감독이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며 긴장 완화와 기업진출의 도화선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축구를 넘어 양국의 갈등과 긴장을 푸는데 큰 역할까지 한 박항서 감독이다.

▶박항서의 미래

베트남과의 5년여 동행을 마친 박항서 감독. 베트남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기에 국내로 돌아와 국가대표팀 혹은 프로팀 감독을 맡을지, 아니면 행정직을 맡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박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베트남과 한국에서는 감독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내에서는 축구협회나 프로축구연맹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나는 행정 능력이 없다. 날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나도 생각은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그가 가고자하는 방향에 대한 힌트 역시 기자회견에서 내비췄다. 바로 외국팀 감독직. 박 감독은 "월드컵에서 카타르 대표팀을 보면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족하지만 그런 팀에서 불러준다면 한번 생각해볼 것 같다. 그런데 불러주는 팀이 있겠나"라고 말한 것.

결국 한국이나 베트남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감독직을 제의한다면 고려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축구를 넘어 동남아시아 축구의 기준을 바꿔놓은 박항서 감독의 향후 행보는 아시아 축구계에서도 큰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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