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최우선"… 영화 마니아들도 인정하는 작가
1993년 데뷔작 냈으나 참담하게 실패… "허영만 화백 문화생때 많이 배웠어요"
요즘 하루 2~3건씩 인터뷰 요청 쇄도… 차기작은 '바둑판속 애환' 그릴것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냥 이 곳에 정착하게 된 것을 다행스러워 하는 듯이, 스며들 듯 사는거다. 천천히 이끼처럼 들러 붙어 사는거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기 위해 시골 마을에 눌러 앉은 '이끼'의 주인공 류해국이 내뱉는 독백이다.

'이끼'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관객 200만명을 넘어서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의 원작자 윤태호(41)는 '이끼'처럼 만화판에 착 달라붙어 있다. 어렵고 힘들 때도 그랬고,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유명세를 느낀다. 하루 평균 2~3건의 인터뷰가 몰려들고 있으니 좀 어리둥절할 정도다.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관계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 논의하면서 영화에서 보여줘야 할 몇 장면을 다시 썼고, 지나치게 만화적이라 영상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삭제했다."

만화 '이끼'는 포털사이트 '미디어 다음'에다 2008년 8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10개월여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2차례씩 80회 연재한 작품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기와 함께 영화 '강풀의 순정 만화'를 만들었던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와 영화화를 위해 판권 양도 계약을 했다.

"렛츠 필름 대표와 강우석 감독이 평소 교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렛츠 필름에서 제작 지원을 부탁하려고 갔다가 인연이 이어졌다. 강 감독께서 평소 만화 원작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마지 못해 '이끼'를 봤던 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계기라고 들었다."

영화 '이끼'도 판권 계약을 하고도 아직 제작하지 못한 윤태호 원작 만화 '연씨별곡'이나 '야후'처럼 묻힐 뻔 했다.

온라인 만화는 반응이 즉각적이다. 댓글을 보면 독자들이 지금 전개되는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웹툰을 그리다 보면 갖가지 댓글에 일일이 응답할 순 없지만 독자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고, 어떤 장면에서 대사를 보강해야 할 지 느끼게 된다."

만화계의 흐름도 이미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주류로 변해가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대를 지망하던 윤태호는 1988년 잡지 '만화 광장' 부설 '만화 연구소'에 들어가 6개월 동안 공부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허영만 화백의 화실이 있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 아파트를 찾아가 문하생이 되고자 했다.

"허영만 선생님의 화실에서 2년간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만화를 완성시켜나가는 기술이 아니라 자세를 배웠다. 기획부터 작품 완성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당시 허영만 화백은 '대머리 감독', '망치' 등 청소년 만화에서 시대극 '오, 한강'으로 작품 경향을 옮겨가던 시기였다. 만화가 단순히 재미의 대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다시 1991년부터 조운학 화백의 문하생이 됐다. 그림은 물론 스토리 구성력까지 익힐 수 있었다.

윤태호는 모든 작품의 스토리를 스스로 완성한다.

"직접 이야기를 꾸며가다 보면 창작의 재미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구성 작가를 따로 쓰면서 그림만 그렸다면 그런 기분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끼'는 어릴 때 경험했던 시골 풍경과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삼아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려고 했다. 아버지는 거대한 싸움에서 패했지만 아들은 강한 집념으로 사소한 승리자가 되는 모습을 축으로 삼았다."

'이끼'는 포털에 연재되면서 총 36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태호,

항상 네 작품의 내면을 믿었다.

그림 좋고, 긴장감 놓치지 않는 연출 좋고,

이 시대는 당신들 것이다.

'이끼'를 보고 있자니 흑백 만화는

생명이 없어 보인다.

이제라도 칼라 공부를 해야 쓰겄다.

윤태호에게 지지 않겠다. - 허영만'

허영만 화백이 '이끼'의 출간을 축하하며 남긴 글이다.

윤태호는 1993년 '비상착륙'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스스로 실패작이라 평한다. 이야기의 구성력이미흡하다는 것이다.

1996년 성인 만화 '혼자 자는 남편'와 흥부전을 바탕으로 한 '연씨별곡'를 그린 뒤 1999년 청소년 만화 '야후(YAHOO)'로 '문화관광부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야후까지는 문하생 때에 익힌 것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윤태호의 그림체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다."

윤태호는 구상 단계에서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 놓는 스타일이다. 먼저 다양한 성격의 인물을 설정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완성 작품이지만 '발칙한 인생'이란 만화를 그리면서 한 명당 4~5장의 성격을 만들었다. 개인적인 히스토리를 만들어 놓고, 서울의 변두리에 사는 다양한 루저들이 야구를 통해 긍정적인 힘을 얻는다는 스토리였는데 연재하는 잡지마다 빨리 폐간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 때 인물을 만들어가던 과정이 '이끼'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윤태호는 자기만의 시선을 지닌 작가다. 장르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스토리를 풀어가느냐에 중점을 둔다. 첫째 조건은 재미다. 그리고 각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컴퓨터 작업으로 웹툰을 그리면서 매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출판은 한정된 독자를 상대하지만 온라인은 크게 다르다. 웹툰을 그리면서 기획자 마인드를 갖게 됐다.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성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독자와 소통할 수 있을지 구상하고 있다. 그림 역시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한 삭제하는 방법을 통해 더욱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윤태호는 영화 '이끼'로 다시 떴다. 2002년 '로망스'로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2007년 본격 한국식 잔혹 스릴러 만화 '이끼'로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과 2008년 부천만화상 일반만화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중견 작가로서 자리 잡았고, 이젠 영화 마니아들까지 윤태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단행본 '이끼' 5권와 전북도 정읍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어린이 축구단의 실화를 옮긴 '당신은 거기 있었다' 를 출판했다. 그리고 20권으로 출판됐던 '야후'를 10권짜리로 복간했다.

다음 작품은 바둑 연구생으로 입단을 꿈꾸다 실패한 뒤 샐러리맨으로 성공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룰 계획이다. 바둑판을 통해 세상 속 삶의 희노애락을 그려 나간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는 평생 직장이란 개념이 없어졌다. 늘 불안한 샐러리맨을 통해 성공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와 인생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 지 그려보고 싶다."

윤태호의 만화는 때론 음산하고, 때론 칙칙하다. 주인공이나 주요 등장 인물들이 성공한 자들이 아닌 탓이리라. 그러나 그 속엔 언제나 긍정의 힘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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