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국내여행] 하동차밭
은은한 맛과 향 "여기 茶 모였네"

난리가 났다. 전국의 관광버스들이 모두 집합했다. 골짜기를 따라 난 길에는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 하얀 꽃 터널 속에서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벚꽃이 핀 쌍계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가는 길. 꽃눈이 흩날리고 비까지 내리면서 이제 화려한 잔치는 비장하게 끝났다. 그러나 1막에 불과할 뿐이다. 벚꽃이 진 화개 골짜기에는 다른 잔치가 시작되고 있다. 꽃 만큼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무게가 있다. 은은한 향기의 차(茶) 잔치이다.

벚꽃 잔치 끝난 화개골짜기 온통 푸른옷 차의 향연…

화개골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다. 시배지(始培地)이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면 약 1,100년 전에 김대렴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차를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차의 달인인 조선의 초의선사가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때는 1838년. 화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차밭이 있으며 화개천을 끼고 40~50리에 걸쳐 차밭이 뻗어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리산 자락 화개 골짜기의 연 평균 기온은 섭씨 13.8도이고 강수량은 1,538㎜. 차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쌍계사, 칠불사 등 스님들이 수도하는 고찰들도 차밭에 생명력을 주었다.

화개 주민들에게 차는 음료이면서 상비약이었다. 약하게 발효시켜 머리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면 먹었다. 작설(雀舌ㆍ참새의 혀처럼 생겼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이 약간 바뀐 ‘잭살’이라고 부른다. 요즘도 이곳 아이들은 차 하면 잭살이고, 아플 때 끓여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즈넉이 자리한 고찰 쌍계사 '토지'의 무대'평사리'도 손짓

세월이 흐르면서 차밭은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전쟁과 개간, 유실수 식재 등이 이유이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간 차밭이 급격히 늘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애호가들이 많아졌고, 고부가가치의 농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서너 곳에 불과하던 찻집도 10여개로 늘어났다.

화개 골짜기에서 차밭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화개천이 흐르는 양쪽 언덕에 차밭이 있다. 특히 화개천을 사이에 두고 벚꽃길과 나란히 나 있는 도로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파란 가래떡을 줄지어 세워놓은 듯한 차밭의 모습. 사람과 식물이 함께 연출한 기이한 퍼포먼스이다.

이제 찻잎을 따는 철이다. 찻잎을 따는 시기의 기준은 곡우(4월20일)이다. 곡우 약 5일 전부터 시작한다. 이때의 차가 가장 상품인 ‘우전(雨前)차’이다. 이후부터 찻잎이 커진다. 세작-중작-대작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평가도 떨어진다.

찻잎 따는 시절을 맞아 하동군은 매년 축제를 연다. 올해로 8회를 맞는 하동야생차 문화축제는 5월8일부터 11일까지 4일간이다. 화개면 운수리 차 시배지 일원과 진교면 백련리 찻사발 도요지 일원이다. 차를 주제로 한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하동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명소가 즐비한 곳. 공장의 굴뚝이 거의 없는 청정지역이기도 하다. 차의 향기에 마음껏 취했다면 맑은 하동땅을 둘러보자.

차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쌍계사가 있다.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지어진 고찰이다. 조계종의 경남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비롯해 문화재급 유물이 즐비하다. 골짜기에 고즈넉하게 들어선 절 자체의 모습도 아름답다.

하동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다. 악양면 평사리이다. 지리산 남부능선인 성제봉 아래로 너른 벌판이 뻗어있다. 산자락에 어떻게 이렇게 넓은 평야지대가 있을까. 감탄이 절로나온다. 벌판의 모습을 잘 보려면 최참판 댁으로 가야한다. 소설에 착안해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3,000여평의 부지 위에 14동의 한옥을 세웠다. 조선 후기 우리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역시 섬진강. 어찌 보면 하동 땅의 가장 큰 축복은 섬진강이다. 강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백사장 위로 푸른 물이 흐른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정화된다. 하얀 모래를 더욱 희게 하는 것이 있다. 강언덕에 늘어선 대나무숲. 파란 유령처럼 봄바람에 흔들린다.

[길에서 띄우는 편지]

차를 마신지 10여년이 됩니다. 물론 일반적인 차가 아니라 녹차(綠茶)를 의미합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대선배가 차생활을 권했습니다. 1인용 찻잔과 세작 한 통을 선물로 주면서 말이죠. 권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당시에는 별로였습니다. 기자가 한가하게 차생활을 즐기라고?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죠. 신발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초년병 기자가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 자체 만으로도 ‘군기 빠진 짓’으로 비난받기 십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급차의 가격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맛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향기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밍밍한 나뭇잎 우려낸 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엄한 선배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배가 볼 때마다 열심히 차를 만들어 마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약을 먹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마침내 선배에게 받은 차 한 통을 다 비웠고, 마치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마음이 개운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차가 없으니 허전했습니다. 입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랄까요. 결국 큰 돈을 들여 선물 받은 것과 같은 차를 한 통 샀습니다. 그 때 느꼈습니다. 은근한 것이 자극적인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이죠. 이제는 책상 위에 찻잔이 아니라 아예 다기 세트를 올려놓고 삽니다. 책상 위가 거의 찻집 수준입니다.

차의 장점을 모두 망라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가지만 꼽는다면 여유로운 마음입니다. 다구를 정리하고 맑은 물을 끓이고, 정성껏 차를 우려내기까지. 바쁜 일상 속에서 한 숨 돌리는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시간과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동의 차밭 앞에 섰습니다. 차밭은 눈으로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향기와 맛이 이미 입과 코를 적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차밭 여행은 이렇게 오감이 모두 즐겁습니다. 단, 차의 매력을 아는 이들에게만 말이죠.

좋은 차가 나기 시작하는 계절, 차밭에 나섰다면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입과 가슴으로도 차의 향기를 담아 오시기 바랍니다. /권오현기자

전라·경상 만나는 화개장터 지척
재첩국·참게 매운탕 별미도 만끽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경부(혹은 중부)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를 타고 진주IC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길을 바꾼다. 순천 방향으로 가다가 하동IC에서 빠진다. 하동읍을 지나 구례쪽으로 약 20㎞를 더 달리면 화개장터이다. 오른쪽으로 쌍계사 가는 길이 나온다.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나와 국도 17호선과 19호선을 타고 남원-구례를 거쳐 전남과 경남의 경계를 넘으면 바로 화개장터이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오전 9시 10분부터 1시간 40분 간격으로 하루 6차례 하동ㆍ화개행 버스가 출발한다. 하동버스터미널(055-883-2662)에서 쌍계사까지 하루 11차례 버스가 왕복한다.

쉴 곳

대형 숙박시설은 없다. 섬진강을 끼고 여관들이 많다. 강변쪽으로 방을 잡는다면 멋진 조망을 누릴 수 있다. 미리내호텔(055-884-7292), 섬진각여관(882-4343), 수빈각(883-4440), 흥룡장(884-1003), 월드파크여관(993-2022) 등이 강을 낀 여관들이다.

화개장터와 상계사 인근에도 숙박시설이 많다. 청송여관(883-2485), 수운각(883-6241), 성운각(883-6302) 등이다. 숙박료는 주중에는 4만원, 주말에는 6만원 선이다. 화개읍의 대부분 민가에서 민박을 친다. 하동군청 문화관광과 (055)880-2373.

먹을 것

민물(섬진강)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하동에는 그 특징에 맞는 특산물이 있다. 재첩과 참게이다. 재첩은 주로 국을 끓여 먹는다. 해감을 시킨 후 푹 끓여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부추를 띄운다. 간 기능을 활성화하는 기능이 있다. 하동의 거의 모든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송림가든(055-883-3819), 옛날재첩국식당(882-0937), 강변식당(882-1369) 등이 유명하다.

참게는 섬진강 주변에서 많이 잡히는 민물 게. 된장과 토란줄기, 고사리, 호박 등을 넣고 탕을 끓여 먹는다. 민물의 매캐한 느낌과 게살의 고소한 맛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화개장터의 동백캑?883-2439), 혜성식당(883-2140) 등이 붐빈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본 기사의 저작권은 한국미디어네트워크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입력시간 : 2003/04/16 17:23:45   수정시간 : 2013/04/25 11:20:18

오늘의 화제뉴스

테마 갤러리 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