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자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인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그리고 감독으로 K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2013년 포항 스틸러스의 우승과 2016년 FC서울의 K리그 우승을 이끈 황선홍(52)이 돌아왔다.

2018년 4월 서울 감독직을 떠난 후 거의 2년만에 다시 K리그 무대로 돌아온 황선홍은 시민구단 대전 시티즌에서 하나금융그룹을 모기업으로 재창단한 대전 하나시티즌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했다.

경남 남해에서 개막 2주여를 남기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대전팀을 지도 중인 황선홍 감독을 만났다.

1편에서는 황선홍의 선수시절과 감독시절 찬란하게 전설이 된 성공에 대해 얘기한다. 2편에서는 황선홍 감독의 선수시절 좌절과 비난, FC서울 감독으로의 실패에 대해, 3편에서는 그가 말하는 2002 한일월드컵과 박지성 등 후배들에 대한 얘기와 2부팀인 대전 하나 시티즌을 택한 이유에 대해 들어본다.

[황선홍 인터뷰①] 황선홍 “14년 대표팀 경력, 난 주전이 아닌적 없었다”
[황선홍 인터뷰②] 황선홍 “FC서울에서의 실패, 유연성이 부족했다”
[황선홍 인터뷰③] 황선홍이 말하는 2002년과 2부 대전을 택한 이유

ⓒ프로축구연맹
▶선수로의 실패 : 1994 월드컵과 수많았던 비난

고작 만 22세의 나이로 다녀온 1990 월드컵은 참가에 의의를 뒀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1994 미국월드컵부터 2002 한일월드컵 유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기면서 ‘우리도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두고 16강을 가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느 월드컵보다 더 기대치가 컸던 19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전국민의 기대는 오직 황선홍에게 쏠였다. 당시만해도 ‘한국대표팀 전력의 50%’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황선홍은 대표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분명 1990 월드컵때만 해도 ‘월드컵에 참가만 해도 성공’이라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1994 월드컵 직전부터 ‘볼리비아는 이긴다’와 같은 낙관론과 기대가 팽배했어요. 그 속에서 저는 온국민이 바라보는 선수가 됐고, 언론에서는 연일 ‘4000만 국민의 기대가 황선홍에게 달렸다’며 헤드라인에 쏟아냈죠. 정말 엄청난 부담감이었죠.”

그 부담감은 결국 황선홍을 삼켰다. “그런 부담감을 이길 경험이 저에겐 없었어요. 이겨야하고 반드시 골을 넣어야한다는 생각에 잠 못 이뤘죠. 결국 독일전에 골을 넣은건 돌이켜보면 대단한건데 그때 제 자신은 ‘왜 이제야 골을 넣었나’는 생각밖에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해도 모자란데 부담감이 몸을 경직시켰고 그래서 무너졌죠”라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황선홍은 나중에 이동국이 그 칭호를 물려받기 전까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욕을 들은 선수’로 남는다. 1990년대에 축구를 본 사람 중에 황선홍 욕을 안한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그가 전설적인 선수로 남았음에도 당시에 그는 가히 ‘욕받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수많은 비난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잘하는 수밖에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정말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했고 스스로도 ‘축구인생 전성기’라고 느낄 정도로 신체-경험-감각 모든게 최고였죠.”

황선홍의 1998년 중국전 부상 장면. ⓒ대한축구협회
하지만 황선홍의 바람은 월드컵 직전 출정식으로 가진 중국과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모두 깨진다. 당시 황선홍은 중국의 과도한 태클로 큰 부상을 당했고 끝내 1998 월드컵 출전이 불발된다.

“내심 ‘월드컵에서 잘하고 유럽을 가야겠다’고 생각해왔어요. 어릴 때 잠시 다녀온 독일로 만족할 수 없었죠. 유럽 진출의 꿈을 꼭 이루겠다고 생각하며 1998 월드컵을 기다렸죠. 하지만 그 부상으로 모든게 산산조각 났죠. 솔직히 그때는 2002 한일월드컵은 나이가 들어 못간다고 생각했기에 ‘내 축구인생은 여기서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을 들은 황선홍의 축구인생은 비극으로 끝나나 했지만 한국 축구사 첫 월드컵 승리의 결승골과 4강 신화의 2002 한일월드컵으로 그의 선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마치게 된다.

▶감독으로의 실패 : FC서울에서 깨달은 것

선수 은퇴 후 코치를 거쳐 부산 아이파크와 포항 스틸러스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좋은 선수는 좋은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스포츠계의 속설을 깬 것이 황선홍이었다. 최용수 감독이 중국으로 떠나면서 황 감독이 부임하자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최고이자 최선의 선택’이라며 FC서울 프런트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물론 황 감독은 2016년 여름 부임 후 그해 서울에게 K리그 우승컵을 안겼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7년 전년도 우승팀의 리그 5위 추락과 2018년에는 시즌 초반 극심한 부진(12개팀 중 9위)으로 인해 지휘봉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 늘 성공할 수는 없어요. 그 대단한 감독들도 모두 실패는 겪죠. 저 역시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도자 생활을 했는지 돌아보는 계기였죠”라며 떠올린 황 감독은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FC서울 팬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겁니다”라며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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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건 전 팀이 정체가 되면 안된다고 봤어요. 정체됐다는건 목표가 없다는겁니다. 팀 전체가 정체되지 않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죠. 변화가 필요한데 그걸 방관하면 지도자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거라 생각했죠. 어떤 비난을 감내해도 변화를 주는게 필요하다고 봤지만 결국 결과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 제 책임이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황선홍 감독 스스로에게도 실망이 컸다고 한다. “아무래도 스스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죠. 서울은 빅클럽이고 한국축구를 리딩하는 클럽인데 실패했다는 자책과 제 스스로도 부산-포항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최고클럽인 서울에 와서 지도자로 완전히 발돋움할 계기로 놓쳤다는 실망도 컸죠”라며 아쉬워했다. “자아성찰의 시기를 가졌다”며 이후 1년반 만에 돌아온 지난 공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실패 요인 중 깨달음으로 다가온 부분이 있는지 묻자 황 감독은 “제가 다소 선수단이 약한 부산과 포항에서 감독을 하다보니 ‘축구는 조직이 하는 것’이라는 철학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틀을 만들면 그 안에 선수들을 집어넣는 축구를 했죠”라며 “그런데 서울은 조금 다르게 접근했어야 하더라고요. 좀 더 넓게 울타리만 쳐주고 선수들에게 맡길건 맡겨야 했었죠. 저는 예전에 했던대로 제 틀 안에 선수를 넣으려고만 하다보니 문제가 생겼죠. 돌이켜보면 ‘조금만 더 유연성이 있었더라면’ 하는 깨달음을 얻게됐죠”라고 했다.

조금 더 큰 틀에서 생각하는 사고가 부족했음을 인정한 황 감독은 “그렇게 저 자신도 성장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대전에서 조금은 선수들의 특성을 더 살리고 맡길건 맡기는 축구를 하려고 해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잖아요”라며 더 나은 지도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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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인터뷰③] 황선홍이 말하는 2002년과 2부 대전을 택한 이유'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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