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영화 '메멘토', '다크나이트', '인터스텔라'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은 2010년 한 영화를 내놓으며 전 세계를 깜짝 놀래켰다. '꿈속의 꿈, 그 꿈속의 꿈'에 들어가 한 가지 생각을 심어놓음으로서 인간이 이전까지 했던 행동과 다른 새로운 행동을 하게 한다는 소재로 만든 영화 '인셉션(Inception)'은 전 세계적인 성공은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 3관왕에 오르며 작품성마저 인정받았다.

마치 누군가 영화 '인셉션'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아르센 벵거(66) 감독의 꿈 속에 들어가 정말 중요한 단 한 가지 생각을 바꿔놓은 것일까. 벵거 감독의 아스널은 지난 19일(한국시각)열린 프리미어리그 22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이전과는 다른 획기적인 경기를 통해 리그 1위를 노리던 맨시티를 적지에서 2-0으로 눌러버렸다.

그 변화는 아주 간단히 한 가지 기록으로 요약된다. 바로 '점유율 35%'. 상대에게 점유율 65%를 내준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기록은 단순히 기록상으로는 '상대에게 더 볼 점유를 내줬구나'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 팀이 전 세계에서 점유율과 패스를 가장 중요시하는 벵거의 아스널이라는 점에서 충격은 안겨준다.

아스널 지휘봉을 잡은 지 어언 20년(1996년 10월 부임). 이미 벵거의 축구는 단순히 축구를 넘어 하나의 이론과 철학으로 자리 잡아있다. 점유율과 패스, 아름다운 축구를 중요시하는 그의 축구 철학은 2003~2004시즌 무패 우승은 물론, 적은 지출과 높은 순위로 지난 20년간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축구 철학을 보여주는 "단 5분이라도 아름다운 축구를 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는 말은 축구 팬들 사이에서 이미 명언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벵거 축구에 대한 반론도 많았다. 무패우승을 달성한 이후 약 11년간 리그 우승이 전무하다는 점, 또한 2013~2014시즌 FA컵 우승을 제외하곤 최근 10년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하며 그저 우승이 아닌 효율만 추구하는 축구를 한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어린 선수에 대한 과신과 함께 가장 크게 지적됐던 축구 스타일에 대한 뚝심 혹은 고지식할 정도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도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맨시티전을 통해 벵거는 고작 35%의 점유율만으로도 강팀을 상대로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따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자신의 축구 철학에 변화를 암시했다. 스카이스포츠에 따르면 아스널이 35%의 점유율을 보인 것은 2003년 기록 집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패배하더라도 점유와 패스만큼은 고집했던 벵거가 이제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우선가치에 있던 패스와 점유를 포기할 수 있음을 맨시티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주관 방송사인 스카이스포츠의 분석가이자 리버풀의 부주장을 역임했던 재이미 캐러거는 "그저 벵거의 아스널이 강팀을 상대로 다른 방법으로 승리했다는 것이 기쁘다"며 "솔직히 이 경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벵거의 아스널이 이런 경기를 한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아스널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강팀에게 져왔는데 다른 방법으로 이겨 아마 맨시티 팬을 제외하곤 모두 이 승리를 기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을 역임했던 개리 네빌 역시 "사실 그동안 아스널은 강팀 상대 원정경기에서도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한 경기를 한 것은 어쩌면 상대팀에 대한 거만함으로 보였다"면서 "(35%의 점유율로 승리한)이 기록은 아스널이 경기를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지난 10여 년간 아스널이 승리한 경기는 점유율이 낮은 경기 였다"고 꼬집기도 했다.

물론 벵거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스널은 이전에도 오늘과 같은 경기를 많이 해왔다. (수비가 약하다는 편견은) 단지 한두 골 뒤처져 있을 때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얘기했지만 미드필더 프란시스 코클랭을 홀딩 미드필더(수비를 전담으로 하고 수비수 바로 앞에 위치한 미드필더)로 활용해 상대 플레이메이커인 다비드 실바를 철저하게 봉쇄했다는 것만으로 그는 분명히 변화를 줬고 그리고 성공을 거뒀다.

그저 흘러가는 경기였을지도 모른다. 아스널 정도 되는 팀이 맨시티 원정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맨시티전 승리는 향후 아스널의 거대한 변화의 시발점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언제, 어떻게 생각의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화 '인셉션'과 같이 단 하나의 생각을 바꾼 벵거의 아스널은 거대한 변화의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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