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에 패배 후 허탈해하는 스페인 주장 이케르 카시야스. ⓒAFPBBNews = News1
[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몰락하는 계급은 언제나 새롭게 대두되는 계급과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한 대목이다. 현재 이케르 카시야스(33·레알 마드리드)의 상황과 유사하다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말이다. ‘몰락하는 계급’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아 보이는 카시야스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이끄는 스페인은 10일(한국시각)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유로 2016 조별리그 C조 2차전 원정경기에서 1-2로 충격패를 당했다. 지난 대회 디펜딩 챔피언인 스페인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40위인 슬로바키아에 경기를 내주며 2006년 이후 8년 만에 유럽선수권 지역 예선에서 패전을 기록했다.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된 선수는 단연 카시야스다. 이날 선발 골키퍼로 출전한 카시야스는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했고 고작 7개의 슈팅에 2골을 허용하며 팀의 역사적 패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델 보스케 감독은 “그 어떤 선수도 비난하고 싶지 않다”고 옹호했지만 이 비난의 절반은 카시야스를 향하고 있는 모양새다.

사실 그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하루 이틀일이 아니다. 이미 2012~2013시즌부터 레알 마드리드에 디에고 로페즈가 영입되자 리그에서 주전자리를 빼앗겼고 지난해에는 리그에서 고작 2경기밖에 출전 못할 정도로 완전히 밀린 모양새였다. 올 시즌을 앞두고 객관적으로는 카시야스가 팀을 떠나야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리어 로페즈 골키퍼가 나폴리로 떠났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5골을 허용하고 망연자실하는 카시야스. ⓒAFPBBNews = News1
이에 대해 대부분은 실력이 아닌 카시야스의 레알 마드리드 내 입지 때문에 로페즈가 파워게임에서 밀린 것으로 해석한다. 오죽하면 레알 마드리드도 카시야스만으로 한 시즌을 보내는 것이 두려웠기에 로페즈를 보내자 이번에는 월드컵을 통해 떠오른 케일러 나바스를 영입하는 ‘보험’을 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그를 꾸준히 신뢰했다. 하지만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의 충격적 몰락에 카시야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이날 슬로바키아에게마저 패하며 카시야스는 이제 몰락한 계급으로 취급받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 골키퍼인 데 헤아에게 주전자리를 내줘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거센 여론에 직면했다.

33세의 나이는 필드 플레이어에게는 황혼의 나이지만 골키퍼에게는 전성기가 시작되는 나이로 인식된다. 하지만 카시야스의 시간은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와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그의 축구 인생이 일반적인 ‘천재 필드 플레이어’의 시간과 함께 해왔기에 이런 그의 노쇠화가 어색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카시야스는 만 19세의 나이부터 세계 최고의 명문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자리를 꿰찬 것은 물론, 스페인 대표팀 데뷔전까지 치렀다(1999년 리그 27경기 출전, 2000년 A매치 데뷔). 2000년 A매치에 데뷔한 후 무려 14년을 사실상 대표팀 주전으로 있었으니 장기집권의 ‘끝판왕’인 셈이다.

이후 카시야스는 단 한 번의 굴곡 없이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 2002 한일월드컵 스페인 대표팀 주전은 물론 클럽에서는 데이비드 베컴-지네딘 지단-호나우도-라울 곤잘레스-루이스 피구-로베르토 카를로스 등으로 구성된 일명 ‘갈락티코’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2002) 등도 해냈다. 출중한 외모와 어린 나이와 뛰어난 기량은 그를 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그렇게 카시야스는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대표팀 주장이 되자마자 유로 2008, 2010 남아공월드컵, 유로 2012 연속 우승이라는 사상 초유의 업적을 달성하며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지만 이제 그에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 듯하다. 과연 ‘몰락한 계급’이 되어 버린 카시야스는 ‘새롭게 대두되는 신흥 계급’과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완전히 사라질까. 아니면 카시야스는 아직 자신의 건재함을 날릴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있을까. 분명한건 카시야스가 큰 위기를 맞고 있고 이 위기가 스페인의 위기와 직면되고 있다는 것만으로 카시야스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