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제작사 대표 송병준… 장나라 소지섭 한예슬 등 발굴해 스타로
작곡가 MC 등 거치며 굴곡 많은 삶… 다음 작품도 만화 원작인 '탐나는도다' 계획

입춘의 햇살이 쏟아진다. 남향으로 난 아치형 통창을 뚫고 깊은 방까지 들어온다.

아기자기하다. 검은 책상 위엔 파스텔톤 색상의 철사로 만든 한쌍의 목 긴 새가 앉아 있고, 하얀 벽장에는 소 두 마리, 중국 도자기, 쿡 뭉개놓은 종이 모양의 작은 소품이 놓여 있다.

요즘 쭉쭉 뜨고 있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제작자 송병준(49) 대표의 사무 공간은 여느 CEO 방과 좀 다르다. 자유롭기도 하고, 내 집의 거실 같다.

'Amy ♡ 송병준, 에이미만 생각하고 이뻐하고 싸랑해주기!! AMY, Amy, Amy! 지우지 맞!!'

화이트보드 같은 한쪽 벽에 남겨진 누님의 딸, 외조카 에이미의 낙서도 있는 그대로 인테리어가 된다. 블랙 책장에는 만화 등 각종 서적이 꽂혀 있다.

숫자 '8'과 지독한 인연을 지닌 크리에이티브 리더스 그룹 에이트의 대표 송병준은 '대중의 눈'을 지닌 자유인이다. 손을 대는 작품마다 인기를 끌자 주위에선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하지만 고개를 가로 젖는다. 자신의 눈높이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을 뿐이란 것이다. 그룹 에이트가 선택한 신인급 연기자들이 인기를 얻고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주위에선 '송 대표의 촉이 좋다'고 말한다.

"제 '촉'이 좋은 게 아니라 대중들의 '촉'이 좋은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제 마음에 드는 연기자들을 선택했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 합니다."

그룹 에이트가 제작한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에는 장나라, '미안하다 사랑한다'에는 임수정과 소지섭, '이 죽일 놈의 사랑'에는 비와 신민아, '환상의 커플'에는 한예슬 등이 출연했다. 당시로선 모두 무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

'꽃남' 역시 마찬가지다.

이름 없는 연기자들이기에 의상 협찬 조차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면서도 결단을 내렸다. 이민호, 김현준, 김 준 등이 주인공인 F4를 맡아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고 있다.

'꽃보다 남자'는 일본에서의 재탕, 타이완에서의 삼탕에 이어 한국에서 사탕을 하는 셈이다.

"스토리는 올드하고,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남자 주인공들인 F4가 다르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익숙한 스토리는 실패가 없는 만큼 어떻게 포장하고, 어떻게 세팅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래서 우리 나름의 F4를 만들려고 했어요."

송 대표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에 천착한다. 작품의 맥을 잡아내면 어떤 점을 강조할지 선택하고, 그것에 매달린다. '꽃남'에서는 스타일링과 미술에 집중했다. 특히 주인공들의 의상과 코디만을 전담하는 별도의 팀을 구성, 스타일링 맵을 그려가며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작가 배정 등 큰 틀의 일은 기획팀에서 알아서 고, 스톱을 결정했어요. 촬영 장소를 정하고, 세트를 만들고, 의상을 제작하는 일 등을 맡고 있어요.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창조하기 위해 의상은 95% 이상 새로 만들고 있는데 관계자들이 너무 잘 뒷받침해주고 있지요."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만들어지려면 잘 짜여진 스태프가 필수. 송 대표는 '꽃남'의 경우 연출 편집 조명 의상 등 좋은 스태프가 있었기에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기획 단계의 구상들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대박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사로 떠오른 그룹 에이트도 처음부터 잘 나가던 회사는 아니었다. 송 대표의 눈물과 구성원들의 고통 분담을 딛고 일어섰다.

작곡가, 연기자, MC로 활동하던 송병준이 처음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9년. 온라인으로 영상물을 거래하는 사업체가 경영의 어려움을 겪자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CEO 자리를 제안했다. 멋 모르고 OK 했던 것이 덧이 됐다.

당시 첫 수익 모델로 준비하고 있던 국제방송영상견본시장(BCWW)의 개최 여부 조차 불투명했다. 송 대표는 원투자자를 직접 찾아갔다. 추가 투자를 부탁했다. 그러나 NO.

"앞이 캄캄했어요. 직원들 월급도 주지 못할 지경이었죠. 어찌나 서러운지 남들이 보건 말건 30여분 동안 펑펑 울었어요. 컨벤션 행사를 진행하려면 최소 10억원에서 12억원이 필요했는데 회사 자금은 5억원 정도 밖에 안 돼 결단이 필요했어요."

송 대표는 전직원과의 회식 자리를 만들었다. 그룹 에이트의 식구들은 지금도 그 때를 '닭도리탕 철탑집 사건'이라며 잊지 못한다.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 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게 한 뒤 "단 한명이라도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 계속 일할 수 없다는 뜻을 보이면 회사를 접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9개월 동안 수익이 생기지 않아 급료를 지급하지 못했지만 잘 참아냈다. 그것이 힘이었다.

제1회 BCWW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새롭게 투자를 받아 드라마 제작에 나섰다. 첫 작품이 '명랑소녀 성공기'였다. 성공했다. 수익이 생겼다. 밀린 월급을 주었다. 이자까지 계산했다. 전사원이 똘똘 뭉쳐 다 망한 회사를 살려냈다.

"개개인이 모두 내 회사라고 생각해요. 직원들에게 '나를 많이 부려 먹어라'라고 합니다. 이젠 CEO로서 더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송 대표는 원래 조직적인 인물이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한 '반 문제아(?)'였다. 대학 지원도 스스로 하지 않았다. 무관심했다. 어머니가 했다. 어릴 때부터 즐기던 음악에 빠져 있었고, 성장기의 롤 모델이었던 리차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처럼 살고자 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피아노바에서 연주하고, 틈틈이 글을 쓰면 더없이 좋겠다고 꿈꿨다.

"대학 때까지도 히피적인 사고와 생활을 동경했어요. 인도 철학에도 빠졌었구요. 전기공학과를 다녔지만 사회학, 심리학 등을 듣는 것이 더 좋았어요. 그러다 인류학에 눈을 떴고, 그래서 미국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습니다."

자유로웠다. 하고픈 일만 했다. 그래도 항상 음악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89년 만 29세로 석사 장교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 시카고 영사관에서 있었던 면접이 문제였다. 당시 면접관과 함께 들어온 모 국회의원이 황당한 질문을 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보세요." "예, 4절까지는 다 모르겠는데요…"

"그럼 625 참전국을 다 외워 보세요." "예, 뭐라구요. 모르겠는데요…"

"아니 대한민국에서 장교를 하겠다는 친구가 그런 것도 몰라요. 애국심이 없구만, 비싼 달러 써가면서."

결국 워낙 시력이 나빠 현역이 아닌 방위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다했다.

방위 소집을 기다리며 한가로울 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고 방송국에 찾아간 것이 인연이 돼 작곡가, 연기자, MC로서 친숙하게 대중들과 만났다.

송 대표는 "음악이 평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드라마 제작이나 컨벤션 사업 등에도 온 힘을 기울인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느라 또 분주하다.

차기작도 만화가 원작인 '탐나는 도다'. 그리고 오는 9월 드라마 '궁'을 뮤지컬 버전으로 만들어 소극장 무대에 올린다.

"또 만화냐고 하겠지만 만화가 갖고 있는 기발한 상상력이 저에겐 아주 매력적입니다. '꽃남'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저희 직원들과 함께 더 발전할 수 있는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송 대표는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내일을 준비한다. 높이 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처럼. 글=이창호기자 사진=김지곤기자

● 송병준 대표와 8…
전화, 이메일, 회사 이름 모습 숫자 8 들어가

그룹 에이트 송병준 대표의 명함에는 숫자 '8'이 엄청 많다.

사무실 대표 전화번호, 직통 전화, 팩스, 휴대전화, 이메일 등에 모두 15개의 '8'가 들어가 있다. 회사 이름 역시 '8'의 영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회사의 모든 내선번호도 '8'을 중심 숫자로 만들었다.

'8'은 송 대표에게 부적 같은 숫자. 사무실 한쪽 벽은 온통 '8'자가 들어가 있는 사진과 인쇄물을 잔뜩 붙어놓았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어릴 적 살던 곳이 대구시 동성로 1가 8-8번지였다.

그게 인연이었을까. 첫 여자 친구의 생일도 8월8일. 회사 창립일도 8월8일이다.

송 대표는 그저 '8'자가 좋단다. 위 아래 균형감 있는 모양도 좋단다. 동양의 수리학에서 '8'자는 꽉 차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숫자라는 것과 12억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부자 되는 숫자'라니 그저 빙그레 웃는다.

● '꽃보다 남자'는…
원작은 일본의 창작만화… 3개국서 드라마 인기

'꽃보다 남자'는 일본의 가미오 요코가 그린 창작 만화다.

1992년 10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소녀 취향의 격주간 만화잡지 '마가렛'에 연재됐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마키노 츠쿠시(한국판 금잔디-구혜선)가 명문 고교에 들어가 재벌 2세인 도묘지 츠카사(구준표-이민호), 하나자와 루이(윤지후-김현중), 니시카도 소지로(소이정-김범), 미마사카 아키라(송우빈-김준) 등 학교를 쥐고 흔드는 F4와 풀어가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다. F4는 Flower 4의 약자.

연재 이후 단행본으로 발행됐고 영화, TV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TV 드라마는 '유성화원(流星花園)'이란 제목으로 타이완에서 먼저 제작됐다.

'꽃보다 남자'는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상황과 성적 표현, 극중 인물들의 위화감 조성 등이 지나치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특히 구준표역을 맡은 이민호는 오랜 무명 시간을 거쳐 일약 스타덤에 올라 연일 방송가의 새로운 뉴스 메이커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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