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토크] 트로트계의 요정 장윤정

전세대(世代)를 아우르는 신세대 트로트 가수 장윤정이 입을 열었다. 일년 중에 몇 번 안 된다는 행사 없는 날을 잡아 술잔을 앞에 두고 기자들과 마주했다.

장윤정은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낯가림이 워낙 심해서 '술이 없이는 절대 인터뷰에 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엄포부터 늘어 놓는다. '얼마나 진솔한 얘기를 꺼낼까?' '술을 그렇게 잘 마시나?' 기자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장윤정이 따르는 과실주 한잔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시원시원한 성격이 아니랄까봐 메뉴판을 보자마자 본인이 내키는 파전과 탕 종류를 시켜놓고는 멋쩍은 지 까르르 웃어버린다. 보스기질이 있어보인다고 넌지시 눙치자 역시나 원래 자리를 주도하는 스타일이란다. 솔직 담백 그리고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장윤정의 별별토크는 그렇게 시작됐다.

# 달동네 설움을 추억하다

빠질 수 없는 것이 주량체크, 지난 번 타블로에게 호되게 당한(?) 남 기자(김성한 기자ㆍ이하 김)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술은 잘 하시나 봐요?"(김) "소주는 술병이 제대로 난 적이 있어서 안 마셔요. 전통주를 주로 마시고 양주는 보통 말아서 잘 마셔요."

곁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던 여 기자(이재원 기자ㆍ이하 이)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 마디였지만 늘 그랬듯이 '별별토크, 오늘도 임자 만났다'는 불길한 느낌을 전문 용어(?) '말다'를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년에 몇 번 안 되는 행사 없는 날이라 장윤정의 표정이 밝은 만큼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가정형편 어려워 달동네 생활도
트로트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운명

'어머나' 히트 솔직히 예상못해
관심은 오로지 노래 노래 노래

"원래 트로트를 하고 싶었나요? "(이) "사실 전례가 없었죠. 젊은 사람이 트로트를 시도하는 예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별 얘기가 다 들려왔어요. '이제 하도 안되니 네가 별걸 다하는구나'부터 '밤무대 뛰려고 저런다'는 소리까지 안 들어본 애기가 없죠."

술잔을 거듭 부딪치며 장윤정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장윤정은 99년에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주가를 올리던 것도 잠시, 계속된 불운이 장윤정의 발목을 붙들었다.

앨범 준비를 했지만 신통치 않았고, 옮긴 회사는 곧 도산했다. 때마침 가세가 기울면서 집안 식구들은 뿔뿔이 각자 흩어져 끼니 걱정을 해야만 했다. 기약 없는 준비기간은 말 그대로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터널 가운데 있는 것처럼 깜깜했다.

"달동네에서 살았어요. 그 높은 곳에서 밤에 도심을 내려다보면 저렇게 집들이 많은데 우리 식구가 한데 모여 살 곳 하나 없나 생각하면서 거의 매일 울었어요. 2000년에서 2003년까지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들 구나 라는 말을 실감했던 것 같아요."

장윤정은 요즘에도 생활고에 시달렸던 시기를 떠올리면 저절로 힘이 난다고 했다. "막노동판의 아저씨나 시장통의 아주머니들이 제 노래를 듣는 3분 동안 모든 시름을 잃고 웃음을 지어보이실 때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그리고 더 밝고 힘있게 노래하겠다는 마음을 먹죠."

# 내 안의 뽕끼를 받아들이다

뭘 해도 안 됐던 준비기간 4년, 장윤정은 거부할 수 없는 트로트의 기운과 마주한다. 마치 신기(神氣)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열병을 앓는 무당처럼,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트로트의 기운' 일명 '뽕끼'는 거세게 온 몸에 퍼져갔다. 정작 문제는 장윤정을 포함한 모두가 그 기운을 외면했다는 데 있었다.

장윤정은 거침없이 한잔을 또 비우더니 "그 때는 내 안에 있는 '뽕끼'가 너무 싫었어요.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은 노래를 끊고 화부터 냈어요. 자꾸 그게 아니라고만 하니까 너무 답답했어요. 자연스럽게 '뽕끼'어린 소리가 묻어나는데 그걸 억지로 다른 소리로 바꾸어 내려고 하니 녹음이 될 리가 있나요. 당연히 안됐던 거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장윤정이 앨범을 준비하던 2000년대 초반은 여자 가수들이 파워풀한 록풍의 댄스곡을 불러 인기를 모으고 있을 무렵이다. 장윤정도 잠재된 '뽕끼'를 무시한 채 억지춘향식으로 이 대열에 합류했다.

"댄스곡에 콧소리가 들어가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어요. 병원 찾아가서 비염이 아닌가 검사도 받아볼 정도 였죠. 비음이 지금 내 노래의 장점이 되는 걸 보면 세상일 참 모르겠어요."

그렇게 4년의 준비기간이 아무런 소득 없이 흘렀다. 기약 없는 준비기간에 장윤정도 회사도 지쳐갔다. 잠이 들 무렵에는 목에서 피냄새가 날 정도로 연습에 매달려 봤지만 이상한 창법의 댄스가수(?)는 데뷔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1년은 아예 회사에 찾아가 '노래 그만 두겠다'고 했다니, 심적 고통을 알만도 하다.

"'난 준비가 다 됐는데 왜 다들 몰라주지?' 하는 생각만 했던 거죠. 원래 단념이 빠른 편이기도 했지만 하루라도 일찍 노래 그만두고 취직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 때 깨달은 것이 많은 사람이 같이 인정해야 그게 능력이지, 나 혼자 잘한다라고 생각하는 건 자만이라는 점이었죠."

장윤정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뽕끼'를 받아들여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스타가 되겠다는 것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허영이었다. 단지 젊은이가 트로트를 맛깔 나게 부를 수도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그대로 주저 앉았겠죠. 그저 노래를 내 식대로 맛깔 나게 부른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지금 사장님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안이 훤히 보이는 승용차에서 옷 갈아입으면서 무대에 올랐지만 한번도 고생스러웠단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요."

# 미운 오리새끼, 전국민을 사로잡다

그렇게 나온 노래가 전국민의 애창곡이 되어버린 공전의 히트곡 다. 귀에 쏙 박히는 멜로디와 장윤정 특유의 비음이 어우러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머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의 히트는 예상을 했나요?"(이) "사실 당시에는 '이상하다'와 '신선하다'로 갈렸어요. 저조차도 약간 '이상하다' 쪽이었거든요.(웃음) 그런데 갑자기 많은 분들이 사랑을 해주시니까 실감이 안났죠. 왜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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