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마다 치러지는 플레이오프는 대개 마지막에 펼쳐지는 NBA 파이널에 대한 기억이 지배적으로 남는 편이다. 동서 양 컨퍼런스 최고 팀들끼리의 대결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래도 그 전 중간에 치러지는 몇몇 플레이오프 시리즈들이 NBA 팬들의 추억에 머물곤 했다. 그런 대결 구도들 중 하나가 1990년대 뉴욕 닉스와 마이애미 히트 사이의 경쟁이었다.

사실 그 당시 이 두 팀이 높은 무대에서 격돌한 적은 없다. 서로 같은 동부 컨퍼런스이기 때문에 NBA 파이널에서 만날 수 없는 이 두 팀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도 상대해본 적이 없다. 매번 1라운드 또는 2라운드였다.

그럼에도 뉴욕-마이애미의 경쟁관계가 훗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들이 있다. 우선 4시즌 연속 대결이란 연속성이 있었다. 1996~97시즌 2라운드, 1997~98시즌 1라운드, 1998~99시즌 1라운드, 그리고 1999~00시즌 2라운드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두 팀이 맞붙었을 때마다 특유의 끈적끈적함이 있었다. 4시즌 동안 서로 마찬가지로 큰 인원변경이 없는 가운데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선수들이 많은 편이었던 두 팀이다.

패트릭 유잉과 알론조 모닝, 이 대학 선후배 센터들 간의 본격적인 대결은 1999~00시즌으로 사실상 끝났다 볼 수 있다. ⓒAFPBBNews = News1
이런 끈적끈적한 양상을 숫자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네 번에 걸친 시리즈마다 어느 팀도 평균 90득점을 넘긴 적이 없다. 최고가 평균 89.6득점이었고 최저가 79득점이었다. 화력이 딱히 높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워낙 느린 페이스의 경기를 펼친 두 팀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팀의 대결 양상은 1999~00시즌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두 팀은 12년 뒤인, 완전히 새로운 인원들로 바뀐 2011~12시즌에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더해 각 팀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맞붙었던 것으로 1999~00시즌 플레이오프는 의미를 가졌다.

▶4시즌 연속 대결 동안 나온 일관성

4시즌 연속 맞붙는 동안 결국 해당 시리즈를 더 많이 통과한 쪽은 뉴욕이었다. 첫 대결인 1996~97시즌에 4승3패로 2번 시드 마이애미가 3번 시드 뉴욕을 꺾은 뒤로는 매번 뉴욕이 마지막에 웃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4연속 플레이오프 대결마다 상위 시드는 매번 마이애미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1997~98시즌엔 마이애미가 2번 시드, 뉴욕이 7번 시드였다. 1998~99시즌엔 마이애미가 1번 시드, 뉴욕이 8번 시드였다. 그리고 1999~00시즌엔 마이애미가 2번 시드, 뉴욕이 3번 시드였다. 때문에 늘 1차전은 마이애미 홈에서 열렸다.

그럼에도 뒤쪽의 세 시리즈 모두 뉴욕이 승리했다. 그런데 매번 가까스로 얻어낸 승리였다. 4시즌 대결마다 두 팀은 매번 마지막 경기 일정까지 갔다. 1라운드가 5전3선승제였던 당시 1라운드에선 5차전까지, 2라운드에선 7차전까지 갔다. 즉 그만큼 흥미진진함을 팬과 시청자들에게 선사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접전이 나오기 일쑤였다. 4시즌 연속 붙는 동안 치른 24경기 중 100득점 이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1996~97시즌 7차전 승리한 마이애미의 101득점이었다. 이렇다 보니 시리즈마다 양 팀의 평균 득점 차이는 정말 근소했다.

또 하나 두 팀 사이에 나온 일관적인 특이사항이라면 느린 페이스였다. 48분 당 포제션을 뜻하는 숫자에서 바스켓 레퍼런스에 따르면 양 팀은 매번 리그 평균보다 느린 페이스의 시리즈를 남겼다.

아예 1997~98시즌부터는 3연속으로 해당 시즌 페이스가 가장 느린 팀보다도 느린 페이스의 시리즈를 치렀다. 그때부터 양 팀은 리그 페이스 순위에서 꽤 느린 축에 들었기 때문이다. 1999~00시즌의 경우 29개 팀들 중 페이스가 가장 느린 팀이 뉴욕(89.2)이었고 마이애미는 4번째(89.7)로 느렸다.

▶서로 낯익은 얼굴들

위와 같은 양상이 나온 데에는 결국 코트 위에서 뛰는 선수들의 플레이 성향이 큰 몫을 했다. 전통적인 포스트 볼 투입 후 몸싸움을 거치는 양상이 이 두 팀 사이에 많이 나왔다.

그런 스타일을 주도했던 이들이 양 팀의 주전 센터들인 뉴욕의 패트릭 유잉과 마이애미의 알론조 모닝이다. 양 선수 모두 탄탄한 체격을 지녀 공격에서도 수비에서도 상대와의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리즈 중 올해의 수비수 트로피를 받은 모닝은 시리즈 평균 23.1득점 10.6리바운드 2.7블록을 기록하며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줬다. ⓒAFPBBNews = News1
그리고 뉴욕의 포워드들로서 1997~98시즌 후 트레이드로 헤어진 203cm 신장 찰스 오클리도, 줄곧 함께한 198cm 신장 래리 존슨도 포지션 대비 작은 신장을 탄탄한 체격의 몸싸움으로 상쇄했다. 마이애미의 파워 포워드 PJ 브라운도 궂은일을 주로 맡아하던 스타일이었다.

한편 외곽 선수들로서 뉴욕에서는 앨런 휴스턴이 줄곧 득점원으로서 나섰고 1997~98시즌까지 있던 존 스탁스는 상대 공격수를 괴롭히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스탁스가 나간 자리는 라트렐 스프리웰이 채웠다. 여기에 크리스 차일드와 찰리 워드가 볼 핸들러로서 나섰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는 프론트코트도 그렇듯이 백코트도 별다른 변화를 거치지 않았다. 볼핸들러 팀 하더웨이에 자말 매시번과 보션 레너드가 득점원으로 나섰고 댄 멀리가 슈터인 동시에 수비 전문 요원으로 나섰다.

1999~00시즌의 올스타로서 뉴욕에서는 휴스턴이, 마이애미에서는 모닝이 선정됐다. 그리고 올NBA팀 선정에는 모닝만이 세컨드 팀에 선정됐다. 또한 모닝은 2시즌 연속 올해의 수비수 영예를 누렸다. 그 전의 3시즌 연속 올NBA 팀에 선정됐던 하더웨이는 1999~00시즌 많은 결장과 기록 하락이 나오며 뽑히지 못했다.

▶끝내 1998~99시즌의 수모를 갚지 못한 마이애미

1998~99시즌 마이애미는 1993~94시즌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이어 역대 2번째로 8번 시드에게 당한 1번 시드의 수모를 당했다. 5차전 막판 휴스턴이 던진 러닝 점프슛이 림과 백보드를 한 번씩 튕기고 들어가며 드라마 같은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 바로 다음 1999~00시즌에도 마이애미는 뉴욕을 상대로 맞이했다. 다만 이번의 컨퍼런스 8위로 마감했던 그 뉴욕이 아닌 자신들과 단 2경기차인 50승32패(승률 61.0%)로 마감한 컨퍼런스 3위 뉴욕이었다. 대신 시즌 맞대결 전적 동률이었던 1998~99시즌과 달리 이번에는 3승1패의 우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홈에서 치른 1차전도 20점차로 패했던 1998~99시즌과 달리 마이애미가 4점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2차전 6점차로 패하며 동률이 됐다. 때문에 홈코트 우위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연장까지 간 원정 3차전을 승리하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3차전 마이애미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신인 가드 앤써니 카터의 플로터는 백보드 뒤에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띄운 어려운 슈팅이었다. 하지만 시리즈를 패한 탓인지 역사적인 하이라이트로 남진 못했다.

이후 2승2패 동률이 된 다음 홈에서 치른 5차전을 6점차로 승리하며 우위는 다시 마이애미에게 향했다. 하지만 이후 두 경기 연속 마이애미는 4쿼터 막판에 끝을 맺지 못했다. 6차전에는 마지막 2분20초 동안, 7차전에는 마지막 1분31초 동안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결국 직전 시즌과 같은 극적인 결말이 아니었을 뿐 마이애미는 이번에도 1점차 석패로 뉴욕에게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다. 3시즌 연속 마이애미 홈 관중은 시무룩하게 돌아가야 했다. 다만 뉴욕은 이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2승4패로 물러나게 된다.

우승까지는 보지 못했어도 1990년대의 뉴욕은 큰 추억을 남길 만한 멋진 모습을 보여준 팀이었다. ⓒAFPBBNews = News1
▶이후 상징적 인물들이 뒤안길로

2000년 9월 무려 네 팀이 참여한 트레이드에서 역사적인 인물이 팀을 떠나게 된다. 15시즌을 오롯이 뉴욕에서 보낸 유잉이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적을 옮기게 됐다. 38세로서 사실상 기량은 크게 기대하지 못할 시기는 맞았지만 11시즌 올스타, 7시즌 올NBA 팀 이력의 선수로서 씁쓸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2000~01시즌 평균 9.6득점 7.4리바운드의 초라한 기록을 남긴 유잉처럼 모닝도 13.6득점 7.8리바운드의 2연속 올NBA 팀 센터에 뽑히던 시절에서 현격히 떨어진 시즌을 보냈다. 무려 69경기를 빠졌다. 훗날 이식수술까지 간 신장질환이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8년의 나이 차가 있었기에 이들이 한참 맞붙었던 1990년대 후반에는 유잉이 저물어가고 있었고 모닝은 한창 뜨고 있었다. 특히 1970년생 모닝에겐 1998~99시즌 및 1999~00시즌이 통상적으로 NBA 선수에게 있어 정점이 달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서로 끈적끈적한 대결을 펼치며 팬들에게 추억을 남겼다. 유잉이 결장했던 1997~98시즌 1라운드 외에는 서로 계속 맞붙었다. 대신 같은 조지타운 대학 출신인 둘은 코트 밖에서 큰 우정을 나눴다.

한편 뉴욕은 2000년대에 들어 샐러리 관리에 큰 미숙함을 드러내며 2001~02시즌부터 2009~10시즌까지 한 번도 5할 승률을 달성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반면 마이애미는 이후 2시즌의 침체가 있었지만 2005~06시즌 우승까지 이루는 성공적인 재건설을 이뤘다.

스포츠한국 이호균 객원기자 hg0158@daum.net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