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켐프를 기억하는 NBA 팬들에게 그의 외모는 꽤 간극이 큰 차이로 기억될 것이다. 날렵했던 때의 모습으로도 기억될 수 있고, 거대한 몸집의 모습으로도 기억될 수 있다.

물론 켐프의 전성기는 날렵했던 때의,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몸담았던 8년차 1995~97시즌까지로 볼 수 있다. 본인의 2년차 시즌부터 함께한 스타 포인트 가드 개리 페이튼과 함께 NBA 팬들의 눈을 사로잡는 플레이들을 숱하게 남겼다.

특히 호쾌한 움직임을 통해 시원하게 마무리하는 모습은 켐프의 위상을 한껏 올려줬다. 2년차 시즌 후부터 붙은 켐프의 별명이 ‘레인맨(Reign Man)’, 경기를 지배하는 자였다.

켐프의 덩크는 실전 덩크에 있어 최근까지도 역대 최고들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AFPBBNews = News1
하지만 아쉽게도 시애틀 이후의 모습은 자신의 별명과는 멀어진 경향이 컸다. 불어난 체중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1969년생으로서 14년차 2002~03시즌, 34세에 마친 NBA 커리어가 길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비교적 짧고 굵게 빛났던 스타이기에 팬들은 여러 갈래 감정의 기억과 추억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의 [NBA현미경]은 켐프가 리그의 대표적인 스타로 올라섰던 과정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스타로서 그가 남겼던 숫자들에 대한 분석이다.

▶뛰어난 운동능력 토대의 빠른 성장

켄터키 대학 입학 후 절도 관련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시즌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1989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켐프는 17순위로 호명 받으며 시애틀에 입단한다.

켐프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유망주로서 이름을 알렸었다. 208cm의 장신에 더해진 뛰어난 운동능력은 큰 기대를 걸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술 측면에선 NBA에서 통할 만큼이 아니었다. 신인 시즌 81경기 출전 중 1경기 제외 모두 벤치에서 나오며 평균 13.8분의 시간만 받았다.

그래도 운동능력을 통한 플레이만큼은 인정을 받았다. 신인시즌부터 5년차 1993~94시즌까지 1992~93시즌만을 제외하고 4시즌 모두 올스타 슬램덩크 대회에 출전했다. 신인 때 8명 중 4위에 올랐으며 2년차 때 2라운드까지 줄곧 1위에 오르며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챔피언은 되지 못했다.

플레이가 다듬어져 주력 인원에 참여한 시기는 빨랐다. 2년차에 평균 30.1분을 기록하며 15득점 8.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4년차에는 팀에서 가장 많은 평균 33.1분을 기록했다.

▶활약 모습에 비하면 작은 덩치의 숫자

한창 때가 시애틀 시절이라 했지만 켐프의 커리어 최고 평균 득점 시즌은 이적 후에 나왔다. 시애틀에서 평균 20득점을 넘겨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최고가 1995~96시즌의 평균 19.6득점이었다.

비슷한 사이즈에서 최고로 꼽히는 운동능력을 통해 빠른 움직임과 고공 플레이를 선보인 켐프의 모습은 훗날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또는 그 뒤의 블레이크 그리핀을 떠올릴 수도 있다.

화려한 드리블 기술은 없지만 외곽에서부터 속도를 붙이고 림으로 돌파할 때의 켐프를 막긴 힘들었다. 그리고 바스켓 근처에서 수비수가 곁에 있더라도 제치고 들어갈 유연성이 있었다. 여기에다 자신의 돌파를 의식해 수비가 떨어질 때면 미드레인지 점프슛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이런 뛰어난 득점 능력에도 엘리트 득점원의 숫자라 할 수 있는 평균 20득점에는 도달하기 힘들었다. 스타더마이어에게 커리어 30득점 이상이 109경기라면 켐프는 22경기였다. 왜 그랬을까.

우선 켐프의 출전시간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시애틀에서 가장 많이 뛴 1996~97시즌의 평균 34분은 해당 시즌 리그 81위였다. 29개 팀 규모 리그에서 분명 높은 순위는 아니다.

이렇게 출전시간이 적었던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파울 관리 부족이었다. 켐프는 2년차부터 11년차까지의 10시즌 동안 평균 4파울을 기록했다. 시즌별로 봐도 줄곧 평균 4파울 안팎이었다. 개인 파울 리그 1위에 올랐던 3시즌을 비롯해 3위 안에 들었던 적이 8시즌이다.

그리고 시애틀의 선수 구성이 켐프에게 집중적으로 공격기회가 돌아갈 배경이 아니었다. 페이튼에 더해 데틀레프 슈렘프, 허시 호킨스, 샘 퍼킨스 등 공격기회를 나눠가질 득점 위협들이 꽤 있었다.

켐프가 시애틀에서 왕성히 득점활동을 펼쳤던 2년차부터 8년차까지 코트 위에 있는 동안 팀의 공격기회를 사용한 지분이 24.6%였다. 이는 통상의 스타 에이스가 보여주는 지분보다 적은 편이다. 대개 25%를 넘기는 경향이다.

1995~96시즌 NBA 파이널 동안 데니스 로드먼 등 강력한 수비 진영의 시카고 불스를 상대로 켐프는 아쉽지 않을 성과를 냈다. ⓒAFPBBNews = News1
▶커리어 최고의 1995~96시즌

켐프의 커리어에서 올NBA팀 선정은 1993~94시즌부터 1995~96시즌까지 세컨드 팀 연속 세 번이다. 그리고 이 중 숫자 측면에서 가장 좋았던 시즌이 1995~96시즌이라 할 수 있다. 평균 33.3분 동안 56.1%야투율로 19.6득점 11.4리바운드 2.2어시스트 1.2스틸 1.6블록을 남겼다.

소속팀 시애틀도 구단 역사 최고의 시즌을 맞이했다. 64승18패(승률 78.0%)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포함해도 구단 역사 최고 성적이다. 다만 동일 시즌에 2015~16시즌 전까지 NBA 역사 최고 성적 기록인 72승10패(승률 87.8%)의 시카고 불스가 있었다.

리그 1,2위를 기록한 시카고와 시애틀은 NBA 파이널에서 맞붙었다. 시리즈는 4승2패로 시카고가 가져가며 2번째 3연속 우승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파이널 시리즈 동안 켐프는 평균 40.3분을 뛰며 55.1% 야투율로 23.3득점 10리바운드 2.2어시스트 1.3스틸 2블록을 기록했다. 시즌 동안의 높았던 기록을 제대로 이은 셈이다.

▶시애틀을 떠난 후의 하락세

얼핏 숫자 측면에서 보자면 시애틀을 떠난 후 켐프가 하락세를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어난 것은 그저 양적인 숫자였지 질적인 숫자는 떨어졌다.

1996~97시즌을 마친 후 시애틀 구단과 마찰을 빚은 켐프는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이어진 두 시즌에서 각각 평균 18득점 및 20.5득점을 올렸다.

평균 20.5득점은 켐프의 NBA 커리어에서 최고이며 유일한 20득점 이상 기록이다. 하지만 시애틀에서 뛴 8시즌동안 야투율 52.1%를 기록했던 켐프는 1997~98시즌 44.5%, 1998~99시즌에 48.2%로 떨어졌다.

그리고 공식 기재 체중이 230파운드(약 104Kg)인 켐프는 단축 시즌으로 늦게 시작했던 1998~99시즌 때 280파운드(약 127kg) 체중으로 트레이닝캠프에 나타났다고 보도됐다. 당시 클리블랜드 농구단장이 실제로는 315파운드(약 143kg)까지 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클리블랜드 시절 켐프는 팬들에게 큰 낯설음을 줬을 만큼 체중 관리에 아쉬움을 보여줬다. ⓒAFPBBNews = News1
1998~99시즌은 평균 20득점을 넘기며 넘어갔지만 1999~00시즌은 확실한 하락세를 보여줬다. 야투율 41.7% 평균 17.8득점이었다. 그리고 2000~01시즌의 평균 6.5득점 이후로 줄곧 평균 6득점 근처를 맴돌았다.

숫자를 떠나 체중 조절에 실패한 이후 켐프의 플레이 모습은 시애틀 시절을 전혀 연상시킬 수 없었다. 상대 빅맨에게 감당하기 힘들었던 주력과 날렵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2002~03시즌 올랜도 매직에서의 한 시즌을 끝으로 NBA 커리어를 끝냈다.

▶아쉬운 커리어 마감이지만 확실한 시애틀의 큰 별

켐프에 대한 안 좋은 뉴스의 정점은 2005년 4월 마약류 소지 건으로 체포됐던 일이다. 그리고 2006년 7월에도 다시 마리화나 소지 건으로 체포됐다. 이 무렵에 NBA 복귀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 켐프에 대한 기억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게 된 기점이었다.

그래도 시애틀 팬들에게 켐프는 큰 추억으로 남겨져 있던 듯하다. 2006~07시즌 11월 5일(이하 현지시각) 경기의 하프타임 동안 시애틀은 40주년 기념 팀 16인 명단을 발표했다. 거스 윌리엄스 및 잭 시크마 등의 1978~79시즌 우승 주역들로 시작해 페이튼을 거쳐 레이 앨런 및 라샤드 루이스 등의 최근 스타들까지 시애틀의 역대 스타들이 모인 팀이었다. 당시 나왔던 선수들 중 가장 오래 박수를 받은 이가 켐프였다.

그만큼 켐프는 시애틀 팬들의 마음을 크게 끌었던 선수였다. 시애틀 팬들을 넘어 세계 NBA 팬들의 마음을 끌기도 한 큰 스타였다. 훗날의 행보에 아쉬움이 크지만 1990년대를 관통했던 스타들 중 꼭 거론해야 할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스포츠한국 이호균 객원기자 hg015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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