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피겨 그랑프리 캐나다에서 스즈키 아키코(왼쪽), 율리아 리프니츠키야(중앙), 그레이시 골드(오른쪽) ⓒAFPBBNews = News1
[스포츠한국 전영민 기자] “체중에 신경 좀 써야겠네.”

지난 1994년, 심판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22세 소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소녀는 미국 국가대표 체조 선수였던 크리스티 헨리치였다.

당시 헨리치의 몸무게는 23kg. 그는 하루 사과 한쪽만을 먹고 몸 안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너무 먹었다고 생각이 들 땐 토해냈다”며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적 요소를 강조하는 종목에 만연한 실태였지만 일종의 ‘직업병’이라며 모두가 쉬쉬한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스즈키 아키코(33·일본)는 10대 시절, 코치로부터 체중 감량에 관한 조언을 받았다.

두 달 만에 16kg을 감량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부터 거식증을 진단받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조건 체중을 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키 161cm에 몸무게가 30kg를 웃돌자 겉모습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됐고, 생사까지 위협받았다. 1년이 지나 거식증을 이겨내고 빙판 위에 복귀한 그는 2008년부터 김연아와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타 종목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선수 생명을 고려할 때, 선수로서의 ‘황혼기’는 이미 지난 뒤였다.

▶평창 금메달 후보를 앗아간 ‘거식증’

2014 소치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단체전 여자 싱글 부문 1위에 올랐고, 러시아에 단체전 금메달을 안겼던 율리아 리프니츠카야(20)는 최근 러시아빙상연맹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그간 유럽에서 거식증 치료를 받아오던 그는 “아쉽게도 모두가 거식증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른 나이에 스스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레이시 골드 SNS
‘포스트 김연아’로 전 세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미국의 그레이시 골드(23)도 마찬가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를 자신의 우상이라 밝혀 한국인들에게도 낯익은 그는 지난해 8월부터 거식증과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고 있는 미국 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사실상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 2명의 금메달 후보가 ‘거식증’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적 요소가 채점 항목이 아닌 종목에서도

비단 채점 항목에 미적 요소가 포함된 종목에서만 ‘식이장애’가 만연한 것이 아니다. 201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KIA 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베아트리스 레카리(31·스페인)도 거식증을 겪었던 경험을 고백했다. 2005년 유럽여자투어(LET) 입회 후 2007년부터 거식증 때문에 18홀을 채 걷지 못했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당시 레카리의 체중은 45kg, 심지어 탈모까지 겪었다. 2007년 LET 경기 중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 투어를 중단하고 집중치료를 받은 사건도 있었다.

이후 거식증을 극복하고 투어에 복귀한 레카리는 LET 측이 출전권을 유지시켜준 덕에 경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는 “마른 체형이 아름답다는 남들의 말을 깊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미 여러분들은 충분히 아름답다”며 마른 외모에 집착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베아트리스 레카리 ⓒAFPBBNews = News1
혹독한 체중 조절, 그리고 식단 관리는 선수 생활에 필연적이다. 몸 관리도, 컨디션 관리도 실력의 일부분이며 성적 혹은 기록과도 직결되는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 결국 대회에서 거둔 성적과 기록은 고통을 이기고 얻어낸 나름의 훈장인 셈이다.

▶마른 아름다움, 그리고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

물론 채점 항목에 미적 요소가 포함되는 종목의 경우도 마찬가지. 피겨 스케이팅의 경우 주요 기술인 점프가 ‘중력’에 맞서야 한다. 몸무게가 가벼울수록 중력의 저항을 덜 받기 때문에 점프는 물론 스핀이나 턴 등 동작 수행이 보다 용이한 것이 사실이다. 체조, 다이빙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미적 요소가 채점의 기준이 되는 종목에서 만연한 식이장애 실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는 무리다. 스포츠 선수들의 거식증은 결코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 여자 선수들만이 아니라 다수의 남자 선수들도 식이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조니 위어(34)는 영국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 또한 엘리트 선수들이 왜 체중을 감량해야 하는지는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아무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율리아와 그레이시가 이러한 문제를 공개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그들을 지지했다.

피겨 스케이팅과 체조 등은 체급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체중에 관한 규정은 없다. 하지만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가지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감안할 때, 체중에 관한 누군가의 한 마디는 곧 그 선수의 강박관념을 생산할 수 있다.

스포츠 선수의 아름다움이 언제까지나 건강을 담보로 하는 ‘마른 아름다움’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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