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김수진 기자]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추운 거리마다 따뜻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겨운 빨간 냄비들이 속속 보이며 구세군 거리 모금의 시작을 알렸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도 있지만 먹고 살기 힘든 처지에서는 10원짜리 하나 선뜻 내놓기가 쉽지 않다. 특히 얼마 전에는 기부에 대한 시선을 차갑게 만드는 사건까지 터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년째 1억원 기부 소식을 전한 스포츠 스타가 있다. 바로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3관왕(신인왕, 상금왕, 올해의 선수)을 휩쓴 ‘슈퍼루키’ 박성현이다.

박성현. ⓒAFPBBNews = News1
박성현은 지난 8일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했다. 올해로 3년 연속 1억원을 쾌척하며 사랑의 열매 고액 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의 스포츠 선수 중 가장 많은 성금을 냈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1억원 이상 기부한 고액 기부자 모임으로 박지성, 김태균, 진갑용, 우규민 등 15명의 스포츠 스타들이 가입돼 있다. 이 가운데 여자 선수는 박인비, 최나연, 김해림, 박성현 등 4명으로 모두 골프 선수다. 삼성 우규민은 가장 최근인 지난 12일 아너 소사이어티 1686번째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최근에는 포항 지진 복구를 위해 스포츠 스타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포항이 고향인 이동국(전북 현대)의 5000만원 기부를 시작으로 3000만원을 쾌척한 황희찬(잘츠부르크), 1000만원을 낸 프로기사 이창호 9단, 삼성 입단식에서 1억원을 기부한 강민호 등 훈훈한 소식이 포항의 아픔을 달랬다.

올해 프로야구에서는 이만수 전 SK 감독, 한화 한용덕 감독, LG 류중일 감독 등 사령탑들이 기부에 앞장선 가운데 연말을 훈훈하게 만드는 미담은 곳곳으로 퍼지고 있다. 국내외에서 이름을 높이는 박성현을 비롯해 우승 상금을 기부한 김해림, 모교에 성금을 낸 신지애 등이 기부에 동참했다.

재능기부로 팬 사랑을 보여준 스타들도 있다. 김연아, 이병규(전 LG), ‘암벽 여제’ 김자인은 6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가 운영한 ‘스포츠 재능나눔 교실’에 참가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원포인트 레슨을 펼쳤다.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6관왕에 오른 이정은 역시 지난 8일 일반인들의 일일 골프 선생님으로 활약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또 기부금 액수의 적고 많음을 떠나 스포츠 스타들의 기부 사례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서, 혹은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등 그 이유도 다양하다.

스포츠 스타들이 나눔을 결심한 계기

스포츠 스타들이 기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1990년대 초반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자. 1994년 LA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빅리그 진출 1년 만에 야구장학기금으로 1억원을 모교 한양대에 기부했다.

2008년 LA다저스 시절 박찬호. ⓒAFPBBNews = News1
이어 1996년 도미니카 윈터리그에서 뛰던 시절 도미니카의 한 고아원에 성금 2000달러를 냈고 다음 해 자신의 이름을 딴 ‘박찬호 장학회’를 설립해 1억원을 쾌척, 활발한 기부 활동을 벌였다.

박찬호와 마찬가지로 해외 무대 경험 후 재단을 세우며 기부에 뛰어든 선수가 또 있다. 바로 한국 남자 골퍼들의 ‘큰 형’ 최경주다.

최경주는 1993년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입회 후 2000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했다. PGA 투어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유니세프에 1000만원, 아동센터 옹달샘에 1억원 등의 성금을 내며 기부를 이어갔지만 ‘최경주 재단’을 만든 건 해외 대회 경험을 쌓은 2007년이었다. 당시 각종 대회 상금으로 모인 100억원이 재단 설립에 쓰였다.

스포츠 전문가들은 스포츠 스타들의 기부 참여가 많아진 원인으로 선수들의 해외 무대 경험을 꼽는다. 국내 선수들이 유럽과 미국 등 세계무대로 진출하며 그곳의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받고 어떻게 사회에 참여하는지 직접 보면서 기부의 힘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넓은 세계를 경험하며 그들의 실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의식까지 키웠고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법을 배웠다. 실제로 최경주는 “타이거우즈를 보면서 우즈가 오랫동안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남을 도우면서 얻는 에너지 덕분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중매체의 발달도 꼽을 수 있다. 대중매체의 발달은 스포츠 스타들이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를 증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SNS와 댓글 문화 등 팬들과 쌍방향 소통까지 가능해지면서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반응을 예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자연스레 대중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된 스포츠 스타들은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실천했다. 기부와 나눔이 스포츠 스타로서 팬 사랑에 보답하고 명성을 이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통한 것이다.

특히 ‘피겨 여왕’ 김연아는 지난 2015년 미국 비영리기관 ‘두섬씽’이 공개한 스포츠 선수 선행 순위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 프로레슬러 존 시나,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에 이어 4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기부 천사로 꼽힌다.

2013년 ISU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1위에 오른 김연아. ⓒAFPBBNews = News1
얼어붙고 있는 기부 문화

스포츠 스타들의 기부 온도는 뜨거워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기부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차갑다. 기부에 대한 불신을 키운 사건이 터지고 나서부터다.

얼마 전 이영학의 여중생 성추행 살해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흉악범죄가 드러날 때까지 그는 ‘어금니아빠’로 방송에 출연하며 거대 백악종이라는 희귀병과 그 병이 유전된 딸, 가난을 내세워 대규모 성금을 챙겼다.

이영학은 수차례 방송 출연 및 SNS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며 기부금 12억원을 받았다. 이중 병원비로 추정되는 2억원을 제외한 10억원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이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사람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구했던 이영학의 극악무도한 정체가 밝혀진 후 기부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부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지자 심지어 ‘기부’와 ‘포비아(Phobia. 공포증)’를 합성한 ‘기부 포비아’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강원도 지역 언론에 따르면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원지회’는 올해 연말까지 기부금 목표액을 158억6000만원으로 정했지만 6일까지 목표액의 절반 수준인 88억8900만원(56%)밖에 모으지 못했다.

또한 지난 11월 20일부터 내년 1월까지 진행하는 ‘희망 2018 나눔캠페인’은 목표액이 97억5600만원이지만 현재까지 7억7900만원만 모금된 상황이다. 지난해 같은 시기에 모은 9억8800만원보다 2억900만원(21.2%)이나 줄어든 수준이다.

지난 12일 아너 소사이어티 1686번째 회원이 된 삼성 우규민. 스포츠코리아 제공
이럴 때일수록 스포츠 스타들이 앞장서야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워지면서 기부 문화도 덩달아 얼어붙고 있다. 방송에 나와 후원을 청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내가 낸 기부금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일까 의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이럴 때일수록 앞장서는 유명인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 스포츠 스타들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유명인의 역할을 해야할 때다.

스포츠 스타들은 대중의 관심과 팬들의 사랑이 있어야 선수로 뛸 수 있다. 팬들이 찾지 않는 스포츠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냉정히 말해 ‘돈’이 있어야 하나의 리그가 움직이고 이 ‘돈’은 스포츠의 인기에서부터 나온다. 사람들의 관심과 선수의 활동 생명은 비례한다.

팬들의 애정을 받고 대중의 이목을 끄는 스포츠 스타들은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포츠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체를 통해 노출되며 그들의 말과 행동 심지어 패션까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많은 팬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그들은 경기장 밖의 모습도 프로다워야 한다.

스포츠 스타들이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면 선수 개인뿐만 아니라 스포츠 자체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것처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이는 모범적 행동은 스포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

스포츠 스타들의 선행은 선한 이미지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선수와 함께 나눔을 실천하도록 팬들을 독려하고 더 많은 대중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스포츠 스타들의 앞장선 나눔 실천은 스포츠계와 기부 문화가 함께 발전하는 길이다.

구세군 종소리와 함께 스포츠 스타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부 소식이 울려 퍼져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달구길 바래본다.

-스한 위클리 : 스포츠한국은 매주 주말 ‘스한 위클리'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스포츠 관련 주요사안에 대해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기사는 종합시사주간지 주간한국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