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프로야구는 두 명의 대형 타자들을 떠나보냈다. KBO리그 역대 최고 좌타자로 꼽히는 이승엽(41·삼성)과 역대 최고 우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호준(41·NC)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KBO리그 10개 팀을 돌며 은퇴투어를 펼쳤던 이승엽과 달리 이호준의 은퇴는 다소 덜 주목받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가 KBO리그에 남긴 족적은 조용히 묻힐 수는 없다.

NC 이호준. 스포츠코리아 제공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담임교사의 권유로 야구에 입문한 이호준은 야구를 위해 광주중앙초로 전학을 떠난다. 충장중-광주제일고를 거친 이호준은 1994년 KIA의 전신인 해태에 입단한다. 입단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이승엽처럼 투수였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팀에 입단하게 됐지만 프로 무대는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기약 없는 2군 생활이 무려 2년간 이어졌다. 이 시기 그는 방황도 많이 했다.

중고교 시절은 물론 프로에서도 합숙 생활을 못 견디고 자주 도망을 다녔던 전례 때문에 ‘빠삐용’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게다가 부상도 찾아오면서 그는 ‘실패한 투수’로 전락하는 듯했다.

그러나 ‘실패한 투수’는 경찰 출신 부친 이을기씨의 눈물 섞인 애원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여기에 운명처럼 찾아온 야구 방망이와 함께 이호준은 새로운 야구 인생을 맞는다. 지난 1996년 타자로 포지션을 전향한 이호준은 이듬해인 1997년(8홈런, 20타점)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타자 전향 이후 3번째 시즌이었던 1998년부터 이호준은 본격적으로 팀 내 주축 타자 반열에 올랐다. 타율 3할3리, 19홈런, 77타점을 기록한 것.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았던 그의 야구인생은 2000년 6월 1일 크게 요동친다. 당시 마운드 보강이 절실했던 해태가 성영재를 받는 조건으로 이호준을 데려온 것. 그는 SK의 창단 첫 트레이드 영입 선수였다.

이적 이후 섭섭함을 느낄 새도 없이 1군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SK에서 부던히 노력했던 이호준은 2년 후인 2002년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주전 1루수로 자리 잡으며 타율 2할8푼8리, 23홈런, 64타점을 기록한 것. 2003년에는 36홈런을 기록하며 리그 홈런 4위에 위치했다.

이호준의 승승장구는 2004년에도 계속됐다. 타율 2할8푼, 30홈런, 112타점을 기록하며 그 해 리그 타점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SK 시절 하이라이트는 역시 2007년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난 8월 SK에서 보냈던 12년 중 2007시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바로 그가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했던 해이기 때문.

당시 김성근 감독이 이끌었던 SK(4승2패)는 두산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당시 주전 1루수로 한국시리즈 6경기에 모두 출전했던 이호준은 4타점을 올려 팀 우승에 일조했다.

2007년은 그가 미래에 지도자를 꿈꾸게 된 계기가 된 시즌이기도 하다. 이호준은 종종 “나중에 지도자가 된다면 2007년 SK와 같은 팀을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SK에서 2008년과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영광의 순간을 두 차례 더 경험한 이호준은 SK에서 보낸 12년간 188홈런, 687타점을 기록하며 SK가 낳은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12년 당시 SK에서 뛰었던 이호준. 스포츠코리아 제공
물론 2017년 현재 이호준이 세웠던 SK 선수 역대 최다 홈런, 타점 기록들은 후배인 최정(30)이 갈아치웠지만 여전히 그는 SK의 전설적 인물로 기억된다. 그가 올해 8월 9일 NC 소속으로 현역 마지막 인천 원정경기를 치렀을 때도, SK가 작게나마 그의 마지막 인천 원정경기 기념식을 열어줬을 정도.

SK에서 야구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던 이호준은 2012년 다시 한 번 야구 인생의 고비이자 전환점을 맞는다.

2012년 두 번째 FA 자격이 주어지자 이호준은 정들었던 SK를 떠나 NC로 향한다. 당시 SK는 이호준과의 계약에 미온적이었고, 신생팀인 NC는 팀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베테랑이 필요했다. “나를 필요로 한다”라는 NC관계자의 말에 이호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NC행을 택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이호준의 결단이 담긴 2번째 팀 이동은 성공이었다. 개인 성적 보다는 헌신하겠다는 자세로 5시즌을 보냈다.

자신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가야 한다는 욕심을 버린 그는 대신 후배들의 성장을 도왔다. 더 이상 스타 선수의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지만 헌신의 결과 이호준은 NC 후배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한 뼘 더 성장했다. 그의 헌신 덕분이었을까. 지난 2014년 이후 NC 선수단은 매 시즌 포스트시즌을 경험하고 있다.

물론 NC에서 단 한 차례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진 못했다. 끝내 그가 원했던 화려한 마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KBO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충분히 장식했다. 이승엽처럼 각종 기록들로 화려함을 독식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여러 유의미한 교훈들을 전해준 선수가 바로 이호준이다.

먼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낼 정도로 포기를 모르는 굳은 의지는 이호준을 수식하는 첫 번째 키워드다. 만약 그가 입단 당시의 신분이었던 2군 투수에 만족했다거나 좌절했다면, 여기에 SK 입단 초기 2년간의 기다림을 견뎌내지 못했다면, 30대 후반 신생팀 NC에서의 도전을 주저했다면 지금의 이호준은 없었다.

역경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이호준의 야구인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팬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인생은 이호준처럼’ 이라는 유행어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

게다가 20년 이상 선보인 꾸준함 하나만으로도 이호준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무려 프로 데뷔 첫 해였던 1994년부터 23시즌간 현역 생활을 지속했다.

NC 이호준. 연합뉴스 제공
이호준이 선보인 꾸준함은 끝내 달콤한 결실로 이어졌다. 그는 KBO리그 우타자 역대 최다 타점(1265타점) 기록을 세우고 현역 마지막 시즌을 마감했다. 그의 꾸준함은 은퇴경기였던 지난 9월 30일 마산 NC전에서도 유효했다. 멀티히트는 물론 끝내 타점까지 올린 것. 당분간 이호준은 KBO리그 역사에서 최고의 우타자로 기억될 전망. 이만하면 성공적인 선수생활이었다.

은퇴 이후 해설자 데뷔와 해외 연수를 두고 고민에 빠졌던 이호준은 현재 해외 연수로 마음을 굳혔다. 사실 이호준 정도의 경력이라면 코치가 되기 위한 준비기간도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호준은 무엇이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드는 것을 기피하는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 이전부터 준비된 지도자가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제2의 인생도 현역 때처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허투루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진다. 숱한 야구 인생의 곡절을 이겨내고 끝내는 화려한 마무리에 성공한 이호준. ‘인생은 이호준처럼’이라는 현역시절 그만의 유행어가 훗날 ‘지도자’가 된 이호준에게도 유효하게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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