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베트맨은 이 고담에 필요한 영웅이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란다. 우리가 쫓더라도 그는 감당할 수 있어. 그는 영웅이 아닌 침묵의 수호자이자 우리를 지켜보는 보호자인 ‘어둠의 기사(다크 나이트)’란다.”

역대 최고의 히어로 영화로 꼽힐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2008년작 ‘다크 나이트’의 마지막 대사다. 명대사로 꼽히는 이 말이 한국축구에 적용될까.

임직원 12명이 배임과 횡령으로 얼룩진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수단의 구설수, 김호곤 기술위원장의 ‘말바꾸기’ 논란까지 겹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영웅은 위기 때 나타나는 법. 과연 ‘딩크 나이트’가 돌아온다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히딩크는 다크 나이트처럼 초인적 힘을 발휘해 한국축구를 바꿀 수 있을까.

ⓒAFPBBNews = News1 영화 '다크나이트' 포스터
▶점점 추락하는 한국축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이후 한국대표팀의 월드컵 성적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2006년 1승1무패 조별리그 탈락, 2010년 1승1무1패 16강 진출, 2014년 1무 2패 조별리그 탈락, 그리고 2017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2위 진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떠난 이후 당연히 4강만큼의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몰락의 내리막길이 갈수록 가팔라지고 있다. 경기력은 처참한 수준의 반복으로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세계 6개국밖에 못한 업적을 달성하고도 귀국장에 축구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최근에는 대한축구협회 임직원 12명이 배임과 횡령 등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한국축구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다. 영웅이 필요로 할 때 ‘딩크 나이트’가 리턴하고 싶다고 밝혔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논란의 중심에 선 히딩크, 잘못된 절차-거짓말 해프닝이 낳은 어색함

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은 우즈베키스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히딩크 감독이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을 의향이 있다는 보도가 히딩크 측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출처는 국내에 있는 히딩크 재단. 여론은 가뜩이나 부진한 경기력에, 또 그동안 답답한 행정을 해온 축구협회에 뿔나 있던 터에 불거진 히딩크 부임설에 폭발했다.

현실 가능성이 떨어지지만 모두가 히딩크를 외쳤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불쾌하다’, ‘연봉을 못 맞춘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초기대응부터 미숙했던 축구협회는 부회장이자 기술위원장인 김호곤의 거짓말 논란에 직면하기도 한다.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첫 보도가 나올 때부터 ‘불쾌하다’고 하더니 히딩크 측이 가장 약점으로 지적되어온 ‘슈틸리케 사임 이후부터 감독 의향을 드러냈어야 진정성이 있다’는 여론을 뒤집듯 ‘6월에 이미 제안을 했었다’고 말하자 김호곤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히딩크 측으로부터 제안 받은적 없다’고 했다.

하지만 히딩크 측이 보낸 문자가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말로 얼버부리며 문자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공식적인 감독 제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었기에 문자 메시지를 그 후로 잊고 있었다”면서 절차와 방법론의 잘못을 주장했다.

실제로 문자내용은 매우 부실했고 심지어 ‘임시감독 후 히딩크 부임’이라는 월권과 다름없는 ‘황당 역제안’을 해 빈축을 샀다.

명백한 말바꾸기를 했던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부임 직후부터 히딩크 제안이 있었는데도 아예 배제하고 ‘국내 감독론’을 펼친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히딩크 측도 잘못된 절차와 방법으로 감독직에 의향을 드러내고 제안 과정에서 월권과 다름없는 내용을 담은 것은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아무튼 이번 사태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술 고문’과 같은 직책도 좋다는 식의 말을 하면서 대략 마무리된 모양새다.

스포츠코리아 제공
▶다크 나이트 되기엔 현실의 벽 높은 히딩크

영화에서 ‘다크 나이트’는 현실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 멋지게 악당을 무찔러 부패와 범죄에 찌든 고담시를 구원한다. 하지만 현실의 ‘딩크 나이트’에게 이런 영웅적 행위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대한축구협회는 9월 마지막주 기술위원회를 통해 히딩크의 역할에 대한 의논할 것으로 보이는데 축구계에는 ‘기술 고문’정도로 조언과 관계 유지 정도의 역할을 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물론 스웨덴이 그랬던 것처럼 2인 감독 체재도 대안이 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히딩크 감독이 기술고문을 맡았을 때 ‘상왕’처럼 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도 히딩크 감독의 대한축구협회 내 세력 부족과 생소한 체재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대표팀 감독 자리를 놓은 지 어언 15년, 세월은 많이 흘렀고 자신을 뒷받침하고 지지하던 세력은 대한축구협회 내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벽은 높고 한국 축구의 현실에서 감독-기술위원장-축구협회장이 아닌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히딩크 감독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국민들은 ‘딩크 나이트’를 원하는가

주목거리는 왜 국민들이 ‘히딩크 대표팀 감독설’이 나왔을 때 그토록 열광했느냐는 점이다.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져주는 것보다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동안 국민들은 연거푸 실망만 안겨준 한국축구에 지쳐있다.

조광래 감독을 중도 사임시키면서 잔여 연봉 지급을 거부하다 법정싸움까지 가서 지급을 인정하고(2011년), 대놓고 ‘싫다’던 전북 최강희 감독을 억지로 ‘대의를 위해’라는 말로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2012년).

또한 최강희 감독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진출 확정 후 자진사임을 했고 1년 남은 월드컵에 프로감독 경험조차 없는 홍명보 감독을 앉혔다(2013년).

홍 감독은 온갖 논란 속에 결국 최악의 성적으로 월드컵에서 탈락했고(2014년) 선수로서는 뛰어났지만 감독으로서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울리 슈틸리케를 감독직에 앉혔다.

그리고 모두가 경질을 외치던 때에는 정작 가만히 있다 월드컵 예선이 2경기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신태용 감독을 앉혔다(2017년). 경기력은 초짜가 봐도 바닥이었고 그 와중에 대한축구협회는 임직원 12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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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한국축구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안긴, 월드컵 1승도 못하던 나라를 4강 진출국으로 바꿔놓은 히딩크 감독의 이름이 오르내리자 여론은 즉각 반응했다.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대표팀이 저지른 황당한 일들의 반증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공감과 이해’라는 단어가 축구계에 필요한 시점이다.

히어로 영화는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기에 인기 있다. 삶이 각박하고 힘들 때 우리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을 원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초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히딩크 감독은 분명 15년전에 영웅같아 보였다. 하지만 15년이 흐른 현재는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으로 ‘딩크 나이트 리턴즈’를 개봉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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