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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2017시즌 메이저리그 연봉 1위(3300만달러, 약 370억원) 클레이튼 커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넘어 세계 이적료 순위 1위(1억유로, 약 1350억원)를 3년간 차지했었던 가레스 베일, 그 베일을 넘어 세계 이적료 순위에 1위(1억500만유로, 약 1420억원)를 차지했던 폴 포그바까지. 현존 최고의 선수들이며 전세계인이 좋아하고 동경하는 슈퍼스타들이다.

이 선수들에게 당연히 유망주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롭게도 ‘한국 선수’들과 인연이 깊다. 유망주 시절, 당시 나이차가 있던 한국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도, 패하기도 하며 혹독한 프로의 세계를 경험했다. 박찬호, 박지성, 이영표와 경쟁했던 이 세계적인 스타들의 유망주 시절을 돌아본다.

  • 왼쪽부터 2008년의 박찬호와 커쇼, 2011년의 박지성과 포그바. ⓒAFPBBNews = News1
▶2008년, 35세 박찬호와 20세 커쇼의 5선발 경쟁

2008년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박찬호는 당시 메이저리그 진출 후 가장 암울했다. 2007년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경기 나와 4이닝 7실점 최악투 이후 마이너리그에서도 6승14패 평균자책점 5.97에 그쳤다. 만 35세가 되는 노장 투수를 향해 ‘먹튀’, ‘한물간 선수’라는 오명만 붙었다.

그런 박찬호가 마지막 도전에 나선다. 자청해서 친정팀 LA다저스의 초청선수 자격으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것. 박찬호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하지만 박찬호 스스로 완벽한 몸상태와 시범경기에서 놀라운 투구(6경기 18.2이닝 평균자책점 2.41, 피안타율 0.159)를 선보였다.

박찬호는 개막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쟁자 부상으로 올라와 불펜에서 뛰었다. 불펜에서 뛰던 박찬호는 지속적으로 선발 로테이션 합류를 노렸다.

커쇼는 마이너리그를 초토화했고 5월 선발투수 한자리가 공석으로 나자 박찬호와 커쇼는 경쟁 선상에 오른다. 불펜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던 35세의 박찬호냐,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20세의 커쇼냐를 두고 다저스 수뇌부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선택은 커쇼였다. 1년 계약의 노장 박찬호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커쇼가 낫다고 본 것. 결론적으로 이 선택은 옳았다. 커쇼는 데뷔전이었던 2008년 5월 26일 경기에서 6이닝 2실점 투구를 했다. 이후 커쇼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현존 최고 투수가 됐다(사이영상 3회, MVP 1회).

박찬호에게도 커쇼와의 경쟁에서 패한 것은 커리어에서 매우 중요했다. 이때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지 못하며 불펜투수로 뛴 것이 박찬호가 2010년까지 계속 불펜투수로 뛰게 된 시작이다.

커쇼는 박찬호에게 많은 것을 물으며 성장했다. 그 모습을 본 박찬호는 “내가 어렸을 때도 나 역시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아 선발 투수가 됐다. 그런 일은 세대가 바뀌면서 반복되는 당연할 일”이라며 노장다운 의연함을 보였다.

박찬호는 1997년 노장 페드로 아스타시오와의 경쟁을 통해 선발투수로 거듭나 아시아 최다승(124승) 투수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대는 바뀌어가는 것이다.

  • 2008년 신인 커쇼와 노장 박찬호의 모습. ⓒAFPBBNews = News1
▶2011년, 박지성으로 인해 맨유 떠나기로 결심한 포그바

2016년 여름, 이탈리아 유벤투스에서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폴 포그바가 기록한 이적료는 1억500만유로. 세계 축구 이적료 1위가 된 포그바로서는 감격적인 이적이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맨유 유소년팀에서 어떻게든 1군에 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자 유벤투스에서 3년을 보낸 뒤 세계 최고의 몸값으로 금의환향했기 때문.

3년만에 세계 최고의 몸값이 될 선수를 왜 맨유는 포기해야했던 걸까. 포그바 스스로 ‘더 이상 맨유에선 힘들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포그바는 2013년 골닷컴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12월 31일 블랙번 로버스와 경기에서 모든 중앙 미드필더가 다쳐 난 내가 주전으로 뛸 줄 알았다. 하지만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박지성과 하파엘이 중앙 미들진을 구성했다. 그 경기 후 이적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결심 후 6개월 뒤 정말 유벤투스로 떠난 19세의 가슴 여린 소년이었다. 경쟁에 뒤져 이적을 결심했을 정도로 포그바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박지성이다.

포그바 입장에서는 자신이 유스팀에서 1군에 들기 위해 노력하던 때 박지성은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과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기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최근 ESPN과의 인터뷰에서도 포그바는 인종차별 등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묻자 “축구선수라면 피부색은 중요치 않다. 그저 경기장 위에서 실력을 보여주면 된다. 내가 호나우지뉴, 메시, 호날두, 박지성을 존경하는 것은 그들이 경기장 위에서 보여준 실력 때문이다”라며 박지성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 2011년 앳된 포그바(왼쪽)와 2017년 현재의 포그바(오른쪽). ⓒAFPBBNews = News1
▶2007년 이영표와 경쟁한 베일, ‘패배의 아이콘’에서 세계 최고의 윙으로 변신

2007년 여름. 만 18세의 가레스 베일은 이영표가 버티던 토트넘 왼쪽 풀백자리의 경쟁자로 입성한다. 가뜩이나 지난시즌 아수 에코토와 경쟁으로 인해 토트넘 입단 첫시즌 31경기에서 21경기로 출전이 줄었던 이영표로서는 경쟁자가 늘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베일은 아직 어렸다. 고작 만 18세였고 왼쪽 수비를 보기에는 덜 성숙했고 수비력도 부족했다. 단지 빠른 스피드와 폭발적인 돌파가 장점이었고 킥이 좋은 호베르투 카를로스 유형의 선수였다.

이영표는 “베일이 영입됐다고 하는데 그정도 경쟁은 필요하다”면서 의연한 자세를 보였고 실제 경쟁에서 베일에 앞섰다. 그러자 토트넘은 이영표를 왼쪽 수비에, 베일은 왼쪽 윙에 두는 형태도 여러번 시험하기도 했다. 이후 베일이 전문 윙어로 자리잡는데 시초가 된 것이 바로 이때다.

큰 기대를 받고 입단했기에 베일에게도 8번의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베일이 나올 때마다 패하는 경기가 공교롭게 많아 ‘패배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련을 이긴 베일은 급격한 성장세를 내보였고 30세가 넘은 이영표로서는 뜨는 신성과 경쟁에서 더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2008년 여름을 끝으로 이영표는 이적을 택했고 이영표가 달던 3번의 등번호는 베일에게 이어졌다. 베일은 자서전을 통해 이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며 기쁨을 표하기도 했다.

베일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고 자신이 우상으로 삼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있던 레알 마드리드로 호날두보다 더 많은 이적료(1억500만유로, 당시 세계 1위)를 기록하게 됐다. 이영표와 경쟁에서 왼쪽 수비가 아닌 윙으로 수련을 쌓은 베일은 결국 세계 최고의 윙으로 거듭난 것이다.

  • 2007년 이영표(왼쪽)와 가레스 베일. ⓒAFPBBNews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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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7/09/16 07: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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