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박대웅 기자] 김성근 감독이 한화 지휘봉을 내려놨다. 사실상 야구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도 막을 내렸다.

한화는 지난 5월23일 김성근 감독의 사의 표명을 수용했다. 이틀 전 삼성과의 경기를 마친 뒤 2군인 퓨처스 선수들의 훈련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면서 한화를 떠나기로 최종 결정했다.

형식은 사의를 구단이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경질과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김성근 감독은 2014년 10월 한화의 제10대 감독으로 취임한 뒤 약 2년7개월 만에 팀을 떠나게 됐다.

그러나 그의 사퇴는 김응용, 김인식과 함께 한국야구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했던 `3김 야구'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만감이 교차할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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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으로의 길, 만년 꼴찌팀과의 만남

재일교포로서 일본 교토의 가쓰라고에서 야구 인생을 시작한 김성근 감독은 1959년 재일동포 야구단 멤버로 한국 땅을 밟은 뒤 이듬해 동아대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한국에서 본격적인 야구 생활을 시작했다.

실업야구 기업은행의 창단 멤버로 활약한 김 감독은 1969년 마산상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고, 기업은행과 충암고, 신일고 등을 거쳐 1982년 OB에서 투수코치로 프로야구 커리어를 열었다. 1984년부터는 프로 감독으로 본격 자리를 잡았다.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에 이어 일본프로야구 지바롯데에서 순회코치를 역임한 김 감독은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해 2007년 SK에서는 마침내 프로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2011년 8월 SK를 떠날 때까지 통산 3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야신’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프로를 떠난 김성근 감독은 2011년 12월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으며, 2014년 10월에는 만년 최하위에 머물러 있던 한화 감독직을 수락하며 다시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남들은 한번도 하기 힘들다는 프로야구 감독을 7번째 맡는 순간이었다.

한화에 취임하기 전까지 김성근 감독은 맡은 팀을 매번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반면 한화는 2009년부터 6시즌 동안 5번이나 최하위에 그쳤고, 앞선 거쳐간 김인식, 김응용 등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명장들의 무덤과도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과 한화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야구 팬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한화는 3년 총액 20억원이라는 최고의 대우와 함께 전권을 위임하며 김 감독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드러냈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해 암흑기 탈출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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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투혼을 불어넣다

취임 이후 한화의 체질 개선 필요성을 느낀 김성근 감독은 일찌감치 지옥 훈련을 예고하며 기본기를 새롭게 다질 것을 선언했다. 첫 마무리 캠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펑고와 특타를 감행해 화제를 불러 모았고, 시즌에 접어들어서도 경기 후 야간 훈련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패배 의식을 걷어내기 위해 시즌 초반부터 일찌감치 승부수를 던져왔고, 팀이 크게 뒤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총동원하는 움직임을 가져갔다.

한화는 2015년부터 두 시즌 동안 총 134승 가운데 절반이 넘는 68승을 역전승으로 장식했고, 비록 패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으로 ‘마리한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물론 2015시즌 68승76패로 6위, 2016시즌 66승75패3무로 7위에 그쳐 가을 야구 진출의 꿈을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취임 직전 49승77패2무로 최하위에 머물러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 성적에서도 분명 발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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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불통의 아이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성공 신화를 이어가지 못한 데에는 이룬 것 이상으로 잃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한화에 유독 다수의 부상자들이 속출한 데에는 선수 혹사 여파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스스로 어려운 상황을 자초했지만 김 감독은 이를 외부의 탓으로 돌려 팬들에게 더 큰 실망감을 안겼다.

취임 초기 전권을 거머쥔 것이 독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유망주보다 즉시 전력감을 수집해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졌으며, 소통의 부재로 구단과 수많은 갈등을 겪었다. 김 감독의 독재 체제를 2016시즌까지는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구조였다.

성적 역시 과거보다 상승했지만 구단에서 FA 영입과 외국인 투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음을 감안하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지난 2년 동안 한화 팬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포스트시즌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올해도 사의 표명 전까지 9위에 머무는 등 뚜렷한 성과를 내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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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야신이 되기 힘든 야인

김성근 감독은 언제나 그랬듯 본인의 프로 7번째 팀과도 새드 엔딩 속에서 갈라서게 됐다. 이미 김 감독 선임 과정에서부터 어느 정도 우려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화 팬들이 청원운동까지 펼쳐 그룹 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룹에서도 모든 것을 감수한 채 오직 성적만을 바라보며 김 감독을 영입했지만 결과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구단은 숙원을 풀지 못했고, 감독은 커리어에 큰 흠집이 생겼다. 취임 초기 김성근 감독을 지지했던 상당수의 한화 팬들마저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큰 비극이다.

야인과 야신을 오가며 고독한 승부사의 길을 걸어왔고, 결국 또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지만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야구는 점점 더 진화해왔다.

본인만의 확고한 철학으로 성적만큼은 보장했던 김 감독이 한화에서는 현대 야구의 흐름을 쫓지 못한 채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에 이제는 명예회복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 `야신'의 시대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스한 위클리 : 스포츠한국은 매주 주말 ‘스한 위클리'라는 특집기사를 통해 스포츠 관련 주요사안에 대해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기사는 종합시사주간지 주간한국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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