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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았던 결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지난 1월, 윤덕여(56) 여자축구대표팀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2018 AFC(아시아축구연맹) 여자 아시안컵 예선 조 추첨에서 북한과 같은 조에 편성된 까닭이다.

당시 한국은 북한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홍콩, 인도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1위 팀에게만 본선 진출권이 주어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난적’ 북한을 넘어야 했다.

북한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호다. 역대전적에서도 1승2무14패로 절대 열세에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는 지난 2005년의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 예선 전 경기는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북한을 넘어야 하는 난제와 마주하게 된 셈이다. 윤 감독 스스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표현한 이유였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훈련장에 대형스피커 6개가 설치된 이유

그렇다고 지레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아시안컵 본선은 2019 FIFA(국제축구연맹) 프랑스 여자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겸하는 대회였다.

북한에 밀려 탈락하면 곧 여자월드컵 출전 기회조차도 사라질 수 있었다. 여자축구연맹(KWFF)과 구단들의 협조 속에 WK리그 개막 일정까지 미룬 채 대표팀을 소집한 배경이었다.

포커스는 철저하게 ‘북한전’에 맞춰졌다. 다른 팀들의 전력을 고려하면 사실상 북한과의 예선 2차전 결과가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컸다.

목포축구센터에 훈련캠프를 차리고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씩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했다. 남자 고교팀들과의 연습경기 등을 통해 옥석도 가렸다.

이색적인 훈련 환경도 조성됐다. 전장이 평양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훈련 내내 북한 응원단의 응원소리가 대형 스피커 6개를 통해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지난 1990년 남북통일축구 당시 선수로 평양길에 올랐던 윤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된 대비책이었다. 윤 감독은 “북한 응원단의 함성소리에 전율이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담금질을 마친 윤덕여호는 지난 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행선지는 평양이 아닌 중국 베이징이었다. 중국을 경유해 북한에 입성해야 했다. 베이징에서도 하룻밤을 묵은 뒤에야 평양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서울에서 200여km 거리인 평양 입성에만 24시간이 넘게 걸렸다.

  • 연합뉴스 제공
'전쟁설'에도 축구에만 집중… 5만여 관중 앞 '결실'

다행히 텃세는 없었다. 대표팀이 묵은 평양 양각도호텔 시설이나 음식 등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묘한 시기에 냉랭해진 한반도 분위기가 적잖이 신경쓰였다.

여자대표팀이 평양에 묵고 있을 당시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이 열렸고, 미국 항공모함이 한반도로 향하고 있다는 등 어수선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대표팀은 호텔에서 방영되던 외국방송 등을 통해 이를 접했다.

대표팀은 다만 오롯이 대회와 경기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5일 인도와의 예선 첫 경기에 나섰다. 김일성경기장에는 태극기가 휘날렸고, 애국가도 울려 퍼졌다.

장내아나운서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명을 정확하게 소개했다. 애국가 연주 등을 거부하며 평양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경기를 치렀던 8년 전 남아공 월드컵 예선 당시와는 달라진 풍경이었다. 첫 단추를 잘 꿰었다. 북한이 8-0 대승을 인도를 상대로 윤덕여호는 무려 10골을 넣었다.

  • 연합뉴스 제공
이틀 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실상 조 1위 경쟁의 분수령이 될 북한전이었다. 경기장에는 5만 여 북한 관중이 들어찼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일방적인 응원과 야유가 펼쳐졌다. 그러나 윤덕여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목포에서 진행했던 ‘소음훈련’이 큰 도움이 됐다.

경기 중 신경전을 주고받는 등 치열한 경기가 펼쳐졌다. 상대가 김정미(33·인천현대제철)의 얼굴을 걷어차는 바람에 선수들 간 몸싸움까지 번졌다.

그러나 대표팀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결국 선제 실점을 내준 뒤, 장슬기(23·인천현대제철)의 동점골에 힘입어 1-1 무승부를 거뒀다. 세계적인 강호 북한을 상대로, 그것도 평양 원정에서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북한 제치고 1위 기적… "칭찬 받아 마땅하다"

이제 1위 경쟁은 예선에서 어느 팀이 더 많은 골을 넣느냐의 싸움이 됐다. 윤덕여호는 늘 북한보다 늦게 경기를 치렀다. 북한이 넣은 득점수보다 더 넣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맞서야 했다. 다행히 윤덕여호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홍콩전 6골, 우즈베키스탄전 4골을 연거푸 넣었다.

결국 한국은 3승1무(승점10) 21득점-1실점의 성적으로 예선을 마쳤다. 북한과 승점 동률을 이뤘으나, 북한보다 3골을 더 넣어 당당히 조 1위에 올랐다. 북한을 제치고, 단 한 장의 아시안컵 본선 진출권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다만 축하 세리머니를 하지는 못했다. 당시 한반도에 흐르던 묘한 기류에 두 팀의 희비마저 엇갈렸으니, 현장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대표팀은 조용히 나오라는 북한 측의 ‘주의’ 속에 기념사진만을 촬영한 채 예선을 마쳤다. 출국 전 옥류관에서 식사를 하려던 일정마저도 일방적으로 취소된 채 귀국길에 올랐다.

  • AFC 제공
윤덕여호는 다시금 중국을 거쳐, 13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베이징으로 향할 예정이던 평양발 비행기가 지연되는 바람에 당초 예정된 시간보다 18시간이나 늦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대표팀의 분위기는 더없이 밝았다. 평양에서 쏘아 올린 ‘기적’ 덕분이었다. 윤덕여 감독은 "어려운 경기를 정말 잘 해줬다. 우리 선수들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며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여자대표팀은 내년 4월 요르단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본선을 준비한다. 중국 일본 등 본선에 오른 8개 팀이 2개 조로 나뉘어 조별리그를 치른 뒤, 각 조 상위 두 팀이 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팀을 가리게 된다. 8개 팀들 중 5위 안에 들면 2019년 여자월드컵에 나설 수 있다.

  •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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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7/04/23 06: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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