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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2016년은 그에게 불명예스럽지만 한편으론 영광스러운 한 해였다. 1월부터 터진 소위 ‘아들 학교 폭력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고 ‘아들 잘못 키운 아버지’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며 억울한 누명은 사라지고 있다. 아쉽게도 그가 바랬던 프로 25번째 시즌은 오지 않았다. 무려 46세 시즌에 명문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도 받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끝내 선수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잊혀졌고 잠정 은퇴 수순에 들어갔다. 7월 자신의 SNS를 통해 공식 은퇴를 선언했고, 9월 18일 자신의 첫 팀이었던 울산 현대에서 은퇴식을 가지며 선수로서 뜨거운 안녕을 알렸다.

706경기 출전은 한국 축구사에 최다 출전 기록이며 무려 24시즌을 뛰고 45세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간 이는 전무하다. 앞으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로 그 이름 자체로 한국축구 역사책 첫 번째 페이지에 기록될 이름이자 우리에게 친근한 ‘형’의 이미지를 가진 김병지(46)의 2016년은 다사다난했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매일같이 올 겨울 최저 기온을 갈아치우던 연말 경기도 구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병지는 “은퇴 후 좀 편할 줄 알았는데 더 바쁘다”며 혀를 내둘렀다.

전날도 지방 출장으로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김병지는 “불러주시는 곳도 많고 해외축구 해설과 준비, 공익재단 준비 등 할 일이 많다. 마냥 백수일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게 어딘가”라며 밝게 웃었다.

그에게서 은퇴를 선언한 2016년을 마치는 소감과 은퇴 이후의 삶, 또한 최고의 골키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국 최고에 다다를 수 있었던 그만의 축구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실력 안돼 프로는커녕 대학도 못가다

김병지는 대기만성형 선수의 표본으로 불린다. 유망주 시절에는 그리 뛰어나지 않은 선수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난 초등학교 때 꽤 했던 선수”라면서도 “물론 프로선수들이라면 초등학교 때 못한 선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제 키가 초등학교 158cm 이후 중학교에서 자라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장신 골키퍼를 선호하는 전통적인 감독님들의 성향상 전 중용되지 않았죠. 자연스레 실력도 오르지 않았고요. 그나마 빠르기는 해서 감독님들이 윙으로 저를 쓰기도 했어요. 그때 드리블이나 패스, 킥을 억지로 연습했는데 그게 결국 이후에 골도 넣고, 드리블이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른 골키퍼와 차별성을 둘 수 있는 밑거름이 됐죠.”

김병지의 얘기를 들으니 자연스레 농구에서 김병지와 다를 바 없는 업적을 세운 서장훈의 일화가 떠올랐다.

서장훈도 중학교 때까지 후보 선수였다. 실력도 부족해 전술훈련을 하지 못하고 매일 드리블 연습과 슈팅 연습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 시간은 누구보다 더 탄탄하게 기본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 서장훈은 센터로서 뛰어난 슈팅력을 보유해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통산 최다득점(13231점)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서장훈의 일화를 들려주자 김병지는 “나와 정말 똑같다. 어린 시절 큰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기본기를 쌓는데 보내면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무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솔직히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전 주목받지 못하는 유망주였죠. 저희 학교도 성적이 좋지 못해 대학진학 요건인 전국대회 4강을 한 번도 하지 못했어요. 결국 절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죠.”

  • 프로축구연맹 제공
▶축구를 위해 공장 입사…흙수저, 상무로 가다

김병지는 그래도 축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머리를 굴리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 축구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사 군입시공부를 했다. 하지만 암기로 되지 않는 영어와 수학에 막혀 낙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강기 제조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회사 축구부에 나갔다. 축구계에 흙수저, 금수저가 있다면 김병지는 흙수저 1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가 그 회사를 갔던 이유는 축구를 할 수 있다고해서였어요. 해군사관학교나 승강기 회사나 들어가려했던 이유는 모두 축구였죠. 생계목적도 있었지만 전 축구를 놓고 싶지 않았어요.”

성인이 된 아들이 축구만 바라보고 미래를 내팽개친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병지의 부모님은 달랐다고 한다.

김병지는 “저희 부모님은 제 의사를 존중해주셨어요. 저를 믿고 응원해주셨죠. 예전사람이지만 깨어있는 분들이었죠. 제가 하는 일을 믿어주시기에 저 역시 막막한 미래 속에서도 오로지 실력향상에만 매진할 수 있었죠”라고 감사함을 표했다.

당시 회사팀은 현재의 K3(아마추어 최고리그)리그 수준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병지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상무 입단 테스트를 보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추어 선수가 상무에 입대하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고 김병지는 상무에서 홀로 연습하며 전설이 될 발판을 마련한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성공가도…‘이정도’ 노력했기에 가능했다

상무를 거친 김병지는 1992년 여름 울산 현대에 입단하며 프로선수가 된다. 입단 2개월만에 주전 골키퍼이자 당대 최고였던 최인영이 경고 누적, 넘버2도 경고 누적, 넘버3 골키퍼는 부상. 4번째 골키퍼였던 김병지가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고 당시 울산 감독이었던 차범근은 과감하게 김병지를 믿고 기용한다. 그렇게 전설은 시작됐다.

“차범근 감독님께서 제가 골키퍼치고 워낙 빠르니까 별명으로 ‘번개’라고 부르셨어요. 예뻐해 주셨죠. 데뷔전은 0-1로 졌지만 당시 호평을 받았어요. 이후 울산에서 주전까지 차지하게 될 때 제 우상이기도 했던 최인영 선배의 모든 것을 배웠기에 가능했어요. 행동 하나하나 모두 습득했죠.”

이후의 성공가도는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다. 김병지는 K리그 베스트11 4회 수상, 올스타전 MVP 1회, K리그 특별상 7회, K리그 우승 1회, 역대 최다출전 1위(706경기), 153경기 연속 무교체 출전, 골키퍼 최초의 필드골 등의 기록은 물론 1998 프랑스 월드컵 주전 골키퍼, 2002 한일 월드컵 4강 멤버 등 A매치에서도 61경기 뛰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이 방대하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실력이 모자라 대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그가 어떻게 이런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전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노력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죽도록 노력해야 해요. 프로선수라면 ‘열심히’는 누구나 해요. 직업이니까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시절부터 죽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돼요. 상무시절 저는 개인 운동을 하기 위해 체력단련실을 정말 많이 갔어요. 체력단련실 출입부를 보면 몇 장을 넘겨도 제 이름이 거의 다일 정도였어요. 아예 미쳐 살았죠. 오죽하면 상무 동료들이 ‘나도 정말 어디 가서는 성실하고 노력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듣는데 너 같은 애는 처음본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버티고 나니 신체적으로 프로레벨에 올라올 수 있더라고요.”

김병지는 선수시절 늘 78kg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울산에 입단했던 22세부터 은퇴하던 45세까지 똑같은 몸무게였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 없이 김병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스한 위클리] 김병지 인터뷰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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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16/12/24 07: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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